한국과 프랑스의 대칭으로 빚어낸 음악
해금·비올라 다모레와 정가·중세 성가
![]() |
| 사운드 아티스트 해미 클레멘세비츠, 해금 연주자 김예지, 비올라 다모레 연주자 올리비에 마랭 [세종문화회관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 이, 오, 우. 모음은 비슷하면서도 애매하게 달라요. 완전히 똑같은 모음도 있지만, 살짝 비슷하면서도 다른 소리를 내죠.”
프랑스 출신의 사운드 아티스트 해미 클레멘세비츠는 한국과 프랑스의 언어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 유창한 언변과 정확한 발음으로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에게 언어는 음악 못지않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한국어를 처음 배울 때, 그가 마주한 것은 낯선 세계의 언어 문법이나 어순의 차이가 아니었다. 입 모양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순간 전혀 다른 울림을 내는 모음의 차이였다.
‘인간의 언어’에서 이성과 뜻을 전달하는 ‘자음’을 걷어내면 남은 소리. 혼자서는 아무런 의미를 전달할 수 없지만, 언어에 숨과 울림을 불어넣는다. 그 태초의 소리 ‘모음’에서 음악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다. 해금 연주자 김예지, 비올라 다모레 연주자 올리비에 마랭, 사운드 아티스트 해미 클레멘세비츠다. 이들은 세종문화회관의 동시대 공연예술축제인 ‘싱크넥스트26’을 통해 프랑스, 한국 합작 프로젝트 ‘바람만으로 모래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3~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로 한 무대에 선다.
한국어의 ‘아’와 프랑스어의 ‘a’가 만나 서로를 울린다. 두 나라의 아티스트 6명이 모인 이 무대의 연결고리는 ‘모음’이다.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김예지는 “아, 이, 오와 같은 모음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지만 각 언어권마다 구강 구조와 쓰임의 영역이 미세하게 다르다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한국어에선 ‘우리’라는 단어가 구체적인 공간성을 가지면서도 나와 너를 합쳐 우리로 부르기도 하지만, 프랑스어에선 또 달리 쓰이더라고요.” (김예지)
이중언어 사용자들은 모국어와 외국어의 차이를 더 크게 느낀다. 설치미술과 사운드의 경계를 탐구하며 한국에서 활동하는 해미 클레멘세비츠의 언어학에 관한 관심은 이 공연의 방향성을 결정한 중요한 키였다.
![]() |
| 사운드 아티스트 해미 클레멘세비츠 [세종문화회관 제공] |
그는 “모음이 길게 지속될 때 생겨나는 소리에 주목해 왔다”며 “언어적 요소지만 언제든 음악적인 느낌을 줄 수 있고, 그 지속적인 소리 자체가 음악적 배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언어에서 출발한 실험은 ‘모음’만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장르로 나아갔다. 클레멘세비츠는 “모음에 천착하다 보니, 한국의 정가(조윤영)를 빼놓을 수 없었고, 그에 맞는 다른 나라의 장르를 찾다 보니 유럽의 중세 성가(크리스티앙 플루아)를 공연으로 가져왔다”고 했다. 정가는 특히 모음의 울림을 길게 늘어뜨려 노래하는 장르다. 우스갯소리로 ‘세계에서 가장 긴 노래’라고 불리는 것도 “아…이…”를 끊지 않고 이어 노래하기 때문이다. 자음 없이 허밍처럼 모음이 지속되는 음악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만남답게 프로그램 구성은 양쪽의 균형을 맞춘 대칭형이다. 우리의 전통음악과 프랑스(유럽)의 악기, 음악이 나란히 배치됐다. 한국에선 정가, 해금, 거문고가 중심을 잡고 프랑스에선 중세 성가와 당시 현악기 비올라 다모레, 전자 음향 등이 낙점됐다. 정가와 중세 성가는 각국의 문화적 원형을 담은 성악 장르로서 대칭을 이루고, 거문고는 정가의 중심축으로서 앙상블의 무게를 잡는 것이다.
해금. 거문고(심은용)와 유럽의 고악기인 비올라 다모레가 서로의 소리를 공유한다. 이 악기들은 인성(人聲)이 만들어내는 잔향 위에 질감을 얻는다.
올리비에 마랭은 “비올라 다모레는 현대 악기와 달리 현 아래 공명현(sympathetic string)이 있어 연주할 때 공명현이 진동하며 배음 구조를 만들어낸다”며 “이러한 공명 메커니즘이 이란의 전통악기 세타르나 한국의 해금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해미의 전자 음향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며 시간과 공간의 축을 다시 그린다. 그는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선이 있다면, 전통 소리와 현대의 전자적 질감 사이에 또 다른 선이 생기는 것 같다”며 “그 안에서 균형을 잡으려 하고 있다”고 했다.
![]() |
| 해금 연주자 김예지 [세종문화회관 제공] |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이질적인 장르와 악기가 섞이는 독특한 실험이었다. 이 시간을 통해 연주자들은 ‘해방의 순간’을 마주하고 있다.
김예지는 해금을 ‘선율 악기’라는 전통의 역할에서 해방시켰다. 해금은 금·석·사·죽·포·토·혁·목의 여덟 가지 재료(팔음)가 모두 쓰인 유일한 국악기다. 그는 “활을 튕기거나 손톱으로 긁고 두드리는 주법을 통해 악기가 가진 재료 본연의 소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했다.
사실 동서양, 과거와 현재의 악기나 장르가 뒤섞이는 실험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연주자에게 이 과정에서 주어지는 미션은 조화였다. 김예지는 “과거 서양 악기와 작업을 할 땐 첼로나 비올라의 음색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농현(弄絃)을 줄이고, 시김새를 억누르며 서양 악기와 닮아가려 했다”며 “해외 활동을 하며 바라보게 된 농현과 같은 한국 음악의 특징은 다른 악기는 흉내 낼 수 없는 연주자 개인의 지문이자 고유한 떨림이었다”고 돌아봤다.
![]() |
| 비올라 다모레 연주자 올리비에 마랭 [세종문화회관 제공] |
김예지는 해금 연주자로서 자기만의 고유성을 무기로 삼아 비올라 다모레의 깊은 배음 위에 거친 촉감의 농현을 얹었다. 시시각각 달리 어우러지는 두 악기는 ‘다름’을 인정하며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었다.
음악은 고정된 악보의 틀에 갇히지 않은 ‘즉흥’의 형태로 나아간다. 공연장의 작은 소음과 관객의 웅성거림도 음악의 일부로 포용해 새로운 감각을 만들겠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공연장 역시 고정되지 않았다. 세종 S씨어터, 수원시립미술관, 일민미술관 옥상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새로운 소리를 입는다.
S씨어터에선 공조기 소리, 조명기 켜지고 꺼지는 소리처럼 공간 안에 있었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로 취급된 소음까지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행궁동 골목길을 옮겨놓은 듯한 건축적 동선을 가진 수원시립미술관에선 높은 층고를 활용해 성당 같은 공명을 만들고, 일민미술관 옥상에선 광화문의 거대한 소음을 하나의 사운드스케이프(하모니)로 뭉치는 현상을 앰비언트로 활용한다.
김예지는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공간의 소리를 꺼내 관객에게 청각적 환기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마랭은 “새로운 도시에 갈 때마다 소리와 소음을 수집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며, “베토벤을 연주할 때도 이것이 현대의 AI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동시대(컨템포러리) 아티스트의 숙명이며, 공간의 소음은 작품에 거대한 영감을 주는 도구”라고 강조했다.
‘바람만으로는, 모래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공연명이 가진 가장 큰 은유는 ‘관객과의 부딪힘’이다. 혼자가 아닌 둘이 되고, 관계가 만들어져야 소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이 공연을 “그 만남의 조건을 탐구하는 ‘소닉 시어터(소리(Sonic)를 극의 핵심 내러티브이자 공간을 재구성하는 주인공으로 삼는 열린 개념의 소리 극장)’”라고 했다.
“눈에는 눈꺼풀이 있어서 보기 싫으면 닫을 수 있지만, 귀에는 ‘귀꺼풀’이 없잖아요. 뚜껑이 없으니 항상 열려 있는 상태죠. 소리는 그저 밀려오는 대로 받아들이면 돼요. 실험적이라는 무거운 장벽을 내려두고,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모음의 울림을 듣던 가벼운 마음으로 소리 자체를 즐기면 좋겠어요.” (김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