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 비웃듯…“지난해 북·러·이란에 가상자산 1000억달러 유입”

원유 결제·무기 조달까지…암호화폐, 제재 회피 핵심 수단 부상
제재 대상국 자금 유입 1년 새 8배↑…달러 금융망 흔드는 우회로
미국당국 거래소 제재 강화에도 블록체인 특성상 완전 차단은 한계

 

[Adobe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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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이정환 기자] 미국의 강력한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이란과 러시아, 북한 등이 국제 금융망을 우회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상자산 활용을 급격히 늘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 투자와 결제를 넘어 원유 판매 대금 수취, 무기 조달, 군사자금 확보에까지 암호화폐가 활용되면서 디지털자산이 국제 금융질서와 지정학 구도를 뒤흔드는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4일(현지시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블록체인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는 미국의 제재 대상과 연계된 가상자산 지갑 주소가 지난해 수취한 자금 규모를 약 1000억달러(약 153조원)로 추산했다. 이는 전년 대비 약 8배 증가한 수준이다.

시장에서는 단순한 거래 규모 증가보다 미국이 구축해온 달러 중심 금융제재 체계에 치명적인 우회 통로가 뜷렸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와 달러 결제망 통제를 통해 제재 대상 국가의 국제 금융 거래를 사실상 차단해 왔다. 그러나 블록체인 기반 가상자산은 은행을 거치지 않고도 국가 간 자금 이동이 가능해 제재 효과를 약화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스테이블코인과 블록체인 결제 인프라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기존 금융망을 거치지 않는 독립적인 거래 구조가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제재 대상국들은 가상자산으로 국경간 자금을 이동시키고, 현지 거래소나 장외거래(OTC)를 통해 법정화폐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제재를 우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이란은 혁명수비대(IRGC)를 중심으로 국내외 암호화폐 거래소를 활용해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으로부터 원유 판매 대금을 받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이 테러단체로 지정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역시 텔레그램 등을 통해 암호화폐 기부를 받아온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정보원을 통해 하마스의 가상자산 모금 방식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의 금융 제재가 강화되자 가상자산 활용을 더욱 체계화했다. 제재 대상인 러시아 국영은행 프롬스뱌즈방크와 몰도바 출신 친러시아 사업가 일란 쇼르 측은 지난해 루블화 가치에 연동된 토큰 ‘A7A5’를 발행해 해외 결제에 활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토큰을 스테이블코인으로 교환한 자금이 중국 드론 업체 결제에 사용된 정황도 포착됐다. A7A5의 지난해 거래 규모는 900억달러를 웃돈 것으로 추산된다.

북한 역시 서방 정보당국은 북한이 대규모 해킹 등 사이버 범죄를 통해 탈취한 가상자산을 세탁한 뒤 연료와 군사 장비 구매, 핵·미사일 개발 자금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사회가 북한의 암호화폐 해킹 조직을 집중 제재하는 이유도 이 같은 자금 흐름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암호화폐가 국가 차원의 제재 회피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가상자산의 본질의 성격도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과거에는 투기성 투자자산이나 신기술로 평가받았다면 이제는 국가 간 경제 제재와 안보 전략을 좌우하는 ‘지정학적 자산’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체이널리시스의 케이틀린 마틴 선임 정보분석가는 “암호화폐는 국제 제재 회피 방식 자체를 크게 바꿔 놓았다”고 평가했다.

미국도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난달에는 이란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인 노비텍스를 포함한 거래소 4곳을 제재했고,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미국이 이란과 연계된 약 10억달러 규모의 가상자산을 압류했다고 밝혔다.

다만 전문가들은 블록체인 생태계의 특성상 거래소나 지갑 일부를 차단하는 것만으로는 제재 효과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하나의 거래소가 폐쇄되더라도 새로운 지갑과 플랫폼이 빠르게 등장하는 구조여서 규제당국과 제재 대상국 간 ‘숨바꼭질’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란의 가상자산 거래를 추적하는 TRM랩스의 아리 레드보드 정책책임자는 “최근 미국의 제재를 받은 이란 플랫폼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며 “눈에 띄는 거점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 아래 형성된 거래 네트워크까지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례가 디지털자산 정책 논의의 초점을 다시 안보와 국제 금융질서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각국이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와 디지털자산 육성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동시에 국가 제재 회피와 불법 자금 이동을 차단하기 위한 국제 공조와 규제 체계 마련도 한층 중요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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