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된 숨결로 가르는 물살…혼연일체의 용선 경주 [트래블ON]

‘홍콩 드래곤보트 페스티벌’ 열전
50주년 맞이한 글로벌 수상 스포츠
굴원의 비극에서 유래한 용선 역사
스타의 거리 채운 대형 야외 파티


모든 참가자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드래곤보트 경주 [홍콩관광청 제공]


[헤럴드경제=김명상 기자] 화려한 마천루가 호위하는 홍콩 빅토리아 하버. 수십 개의 노가 동시에 물살을 가르는 순간, 발밑의 땅까지 울릴 듯한 함성이 터진다.

0.1초에 희비가 엇갈리는 승부의 세계에서 선수들이 탄 보트 주변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은 이들이 흘린 땀방울과 닮았다. 고층 빌딩 숲이 만들어낸 우아한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원시적인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역설의 이벤트, 그 어떤 계절보다 뜨거운 생명력으로 요동치는 ‘홍콩 드래곤보트(용선) 페스티벌’의 현장이다.

하나로 뭉친다…종이 한 장 차이의 승부


‘2026 홍콩 드래곤보트 페스티벌’ 경기 장면 [홍콩관광청 제공]


홍콩 관광과 쇼핑의 중심지인 침사추이 해안 산책로 일대에 이르자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붉은 문이 나타났다. 화려하게 장식된 문을 넘어서는 순간, 도심의 분주함은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한 ‘홍콩 드래곤보트 페스티벌’은 매년 음력 5월 5일 단오절 전후에 열리는 홍콩의 대표적인 여름 축제이자,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글로벌 수상 스포츠다. 올해 축제에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16개국에서 220여 개 팀, 4500명 이상의 인원이 참가했다.

‘2026 홍콩 드래곤보트 페스티벌’을 알리는 문 [김명상 기자]


지난달 27일부터 이틀간 치러진 올해 페스티벌은 각국 대표팀이 겨루는 인터내셔널 챔피언십, 금융·관광 등 업종별 초청 경기, 이색 복장 경연 등 20여 개 부문이 촘촘하게 맞물려 진행됐다. 예선과 준결승을 포함해 하루에도 수십 차례의 경기가 열려, 관람객들은 언제 방문해도 박진감 넘치는 레이스를 끊임없이 즐길 수 있었다.

메인 경기가 펼쳐진 침사추이 동쪽 해안은 이른 아침부터 인산인해였다. 인터컨티넨탈 스탠포드 호텔 인근 출발지부터 스타의 거리 이소룡 동상 앞까지 이어진 500m 길이의 수로는 바지선으로 일반 선박의 진입을 전면 차단해 오직 선수들만을 위한 무대로 조성됐다.

드래곤보트에 출전한 팀을 응원하는 관람객들 [홍콩관광청 제공]


경기 시작 전부터 커다란 망원렌즈를 장착한 사진가들이 선수들의 역동적인 몸짓을 포착하기 위해 빼곡히 모여들었다. 20명이 넘는 인원이 한마음으로 필사의 질주를 펼치는 모습을 놓칠세라 장비 점검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무더위 속에서도 수천 명의 인파가 모였고, 이들이 쏟아내는 열기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달래주었다.

출발 대기선에서 준비 중인 선수들을 향해 각국 응원단이 목청껏 목소리를 높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응원전 역시 또 다른 관전 포인트였다.

‘2026 홍콩 드래곤보트 페스티벌’ 경기 장면 [홍콩관광청 제공]


드래곤보트 경주에는 총 22명의 선수가 탑승해 호흡을 맞춘다. 역할에 따라 노잡이, 키잡이, 북잡이로 구분된다. 노잡이는 총 20명으로, 배 내부에서 좌우 10열로 2명씩 앉아 물살을 가른다. 배 뒷고물에 탑승하는 키잡이 1명은 고정 키를 조작해 배의 진행 방향을 실시간으로 조정하며, 배 앞에 자리한 북잡이 1명은 북을 쳐 노잡이들의 노 젓는 박자와 속도를 주도한다. 경주는 이들의 유기적인 협업과 정밀한 역할 분담이 승패를 결정짓는 수상 스포츠다.

‘2026 홍콩 드래곤보트 페스티벌’ 대회 현장 [홍콩관광청 제공]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기수의 힘찬 북소리에 맞춰 수십 개의 노가 동시에 물을 밀어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선수들의 움직임이 혼연일체를 이루며 질주하는 장관은 보는 이들의 숨마저 멈추게 한다.

선수들의 갈라진 근육까지 보일 만큼 배가 결승선에 가까워지면 현장의 열기는 최고조로 치닫는다. 현장 아나운서의 격양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흐르면 선수들은 마지막 스퍼트를 올린다. 마침내 용머리가 도착지를 지나면 경기가 종료된다. 모든 힘을 쏟아내 얼굴이 일그러진 선수들의 얼굴에는 순위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

간발의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드래곤보트 경주 [홍콩관광청 제공]


이날 하루 동안 펼쳐진 수십 번의 용선 경주는 어느 것 하나 놓치기 힘들 만큼 치열했다. 용머리 장식이 먼저 도착점을 통과하는 순서로 순위가 갈리는데, 실력 차이가 비등한 경기에서는 불과 손바닥 하나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기도 했다.

육안으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의 초접전이 펼쳐질 때는 TV 중계 화면이 프레임 단위로 화면을 쪼개어 도착 장면을 보여줬고, 결과를 확인한 관객석에서는 탄성이 쏟아졌다. 국내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경기인 만큼,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신나는 경험이었다.

굴원의 비극에서 아시안게임 종목으로


경기를 마치고 기념 사진을 찍는 드래곤보트 경주 출전 선수들 [홍콩관광청 제공]


이토록 치열한 경기의 뿌리는 중국의 한 시인이 맞이한 비극에서 시작됐다. 기원전 278년, 중국 초나라의 시인 굴원은 조국이 진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과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음력 5월 5일 스스로 돌을 안고 멱라강에 투신했다. 충직하고 강직한 신하로 이름난 그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큰 슬픔을 안겼고, 마을 어민들은 배를 몰고 나가 물고기들이 그의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북을 치고 노를 저었다. 이것이 오늘날 드래곤보트 경기의 시초다.

축제장에 전시된 드래곤보트 [김명상 기자]


지금과 같은 형태의 경주는 1976년 홍콩섬 동부의 사우케이완에서 처음 개최된 이후 회를 거듭하며 글로벌 스포츠로 외연을 확장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성화가 용선에 실려 빅토리아 하버를 건너는 상징적인 이벤트를 거쳐,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최초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경주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에는 홍콩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정식 등재됐으며, 이제는 홍콩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핵심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2000여 년 전 강물에 몸을 던진 한 시인의 이야기가 국제 스포츠로 되살아나 눈앞에 펼쳐지는 셈이다.

경기를 마치고 기념 사진을 찍는 드래곤보트 경주 출전 선수들 [홍콩관광청 제공]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이번 대회에 출전한 백석대학교 팀의 레이스도 눈길을 끌었다. 코로나19 이후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비록 입상은 하지 못했지만, 이들의 도전은 성적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백석대팀은 지난 4월 대회 개최 정보를 접한 후 한강에서 실제 배를 타고 합을 맞춰본 것은 단 세 번뿐이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해 거친 물살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잠시 흔들리는 모습도 보였지만, 학생들은 끝까지 완주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순위 경쟁보다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 국경을 넘어 소통하는 것에 가치가 크다는 평가다.

김성덕 백석대학교 스포츠경영전공 주임교수 [김명상 기자]


현장에서 만난 김성덕 백석대학교 스포츠경영전공 주임교수는 “해외 취업률이 높은 학교이다 보니 학교 중심 액티비티에서 벗어나 글로벌 역량 함양을 위해 참가하게 됐다”며 “학생들은 다른 나라 선수들과 경쟁하고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세계 무대에 도전할 용기를 얻게 된다”고 말했다.

경기 외에도 재미 가득…찍고 마시고 먹는 즐거움


‘2026 홍콩 드래곤보트 페스티벌’ 대회장 주변 전경 [김명상 기자]


드래곤보트 대회는 더운 날씨마저 잊게 해줄 홍콩의 대표 관광자원으로 발돋움했다. 축제 기간 중 침사추이 스타의 거리 일대를 비롯해 솔즈베리 가든, K11 뮤제아(MUSEA) 앞길 일대까지 이벤트 공간이 확장돼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썩인다.

바닷가에 줄지어 늘어선 파라솔, 흩날리는 용 모양 깃발, 관중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 푸드 부스와 형형색색 유니폼을 입은 참가자, 가족과 연인 단위의 방문객 등이 어우러진 이곳은 거대한 야외 파티장이나 다름없었다.

스타의 거리에 마련된 미니언즈 포토존 [김명상 기자]


다양한 문화·체험 프로그램도 축제를 풍성하게 채웠다. 전통 방식으로 제작된 용선 실물이 전시된 공간 주변에서는 연도별로 드래곤보트 경주의 역사를 소개했다. 또한 미니언즈와 같은 인기 캐릭터, 현지 협찬사인 선라이프사가 띄운 대형 요트, 코카콜라 등 글로벌 기업들이 조성한 포토존이 마치 올림픽 대회를 연상케 하며 흥을 더했다.

드래곤보트 축제를 기념한 용 모양의 아이스크림 [김명상 기자]


미식도 빠질 수 없었다. 스타의 거리 인근에 마련된 ‘푸드 레인’에서는 용을 테마로 한 이색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비롯해 각종 음식을 판매했다. 비어 가든에서는 여권을 제시하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1인당 맥주 쿠폰 1매를 무료로 제공하는 혜택도 선보였다. 덥고 습한 날씨 속에서 기력을 다해 응원하던 관람객들은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무더위를 날려 보냈다. 굴원을 위해 대나뭇잎에 싼 찹쌀밥을 강에 던졌던 풍습에서 유래한 ‘쭝쯔’를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 코너에도 긴 줄이 늘어섰다.

찹쌀을 대나무 잎이나 연잎 등에 싸서 만드는 ‘쭝쯔’ [홍콩관광청 제공]


이제 드래곤보트 행사는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함께 즐기는 글로벌 페스티벌이 됐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굵은 땀방울과 환호성으로 가득했던 용선 축제장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충전해 주는 거대한 발전소 같았다. 치열한 경주 끝에 서로를 인정하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소통하는 젊은 선수들의 모습에서, 수백 년의 시간이 누적된 전통이 어떻게 현대의 일상 속으로 흘러 들어와 생명력을 이어가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 뜨거운 열기는 내년 6월에 다시 재현될 예정이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