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사퇴 의사 소식에 9만900달러 돌파
SEC·리플 등 업계간 소송 리스크도 완화
트럼프 당선인의 친(親)가상자산 기조와 대립각을 세웠던 개리 겐슬러(사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이 사퇴 의사를 밝혔다. 시장에선 그가 SEC 수장에서 물러나면서 ‘트럼프 가상자산 정부’를 위한 마지막 퍼즐도 채워졌다는 평가다. 규제 완화 기대감에 비트코인은 사상 첫 9만9000달러를 돌파하며 10만달러 시대에 한 발짝 다가갔다.
21일(현지시간) SEC에 따르면 겐슬러 위원장은 이날 “내년 1월 20일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1월 20일은 트럼프 당선인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는 날이다. 겐슬러 위원장은 2026년까지 잔여 임기를 남겨 두고 있지만 정권 교체에 따른 관례대로 사임키로 한 것으로 보인다.
겐슬러 위원장은 가상자산을 “무법천지 서부시대”에 빗대며 규제 정책을 펼친 대표적 반(反) 가상자산 인물이다. 2021년 4월 SEC 수장에 오른 겐슬러 위원장은 가상자산이 기존 자산과 달리 위험과 불확실성을 내포한다고 간주하고 투자자 보호를 강화했다. 같은해 8월 가상자산 보안 세미나에서 “가상자산 시장에 사기가 만연하다”며 “솔직히 무법천지였던 서부시대(Wild West)와 같다”며 강력한 규제를 예고했다.
수탁업 의무회계 지침(SAB121)은 갠슬러 SEC의 대표적인 규제정책이었다. SAB121은 은행이 가상자산을 보관할 경우 이를 ‘부채’로 표기하게끔 하는 지침이다. 통상 기업이 고객을 대신해 자산을 보관할 경우 기업의 자산, 부채로 여기지 않고 대차대조표에도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SEC는 엄격한 회계 잣대를 들이밀며 사실상 위험자산으로 간주한 셈이다. 업계 반발 속 지난 7월 미국 상·하원에서 SAB121 무효화 법안이 통과됐지만 겐슬러의 가상자산 정책 기조를 여실히 담고 있다.
겐슬러 위원장은 가상자산 상품 출시도 규제했다. 비트코인 이외 가상자산에 대해 증권성을 인정하면서다. 대부분 가장자산이 ‘미등록 증권’에 해당한다고 보고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등 상품 출시에 제약을 걸었다. 지난 7월 SEC로부터 현물 ETF가 승인된 이더리움도 당초에는 증권성 논란으로 출시가 불투명했다. 이더리움 현물 ETF 출시에 부정적 기조였던 겐슬러 위원장이 돌연 승인으로 입장을 바꾼 건 미국 대선을 앞두고 바이든 정부에 부담을 준다는 정치적 이유로 해석된다.
겐슬러의 SEC와 업계 간 소송 리스크도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SEC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가상자산업 관련 104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리플을 발행하는 리플랩스는 SEC와 소송을 벌인 대표적 회사다. SEC는 2020년 12월 리플 법에 의한 공모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불법 증권이라는 이유로 발행업체 리플랩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8월 법원은 리플 손을 들어줬다. 이밖에 바이낸스, 코인베이스 등 회사와 소송이 진행 중이다.
겐슬러 위원장이 물러나자 가상자산 업계는 발 빠르게 상품 출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날 시카고옵션거래소(CBOE)는 SEC에 반에크, 21셰어즈 등 4개 솔라나 현물 ETF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겐슬러가 물러난 SEC가 솔라나 현물 ETF에 대한 심사를 시작하면서 시장에서는 2025년 승인 전망이 나온다.
차기 SEC 위원장이 선임되면 트럼프 2기 가상자산 정부도 완성된다. 이미 미국의 경제 및 산업 정책을 총괄하는 상무부장관에는 가상자산 옹호론자인 하워드 러트닉 캔터피츠제럴드 CEO가 내정됐다. 차기 SEC 위원장 후보로는 댄 갤러거 로빈후드 최고법률책임자, 크리스 지안카를로 전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위원장, 헤스트 피어스 현 SEC 위원 등 친가상자산 인물이 거론된다. 트럼프 당선인은 사상 처음으로 백악관 내 가상자산 정책을 전담하는 직책 신설을 두고 저울질하고 있다. 백악관 가상자산 전담팀마저 꾸려지게 되면 의회, 백악관, SEC,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간 소통을 거쳐 규제 완화가 예상된다. 유동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