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의 “나는 공범” 고백 한 달… ‘잔인한 금융’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홍길용의 화식열전] (896)

※ 2008년 8월 ‘홍길용의 머니스토리’로 시작해 ‘홍길용의 화식열전’으로 이름을 바꾸며 18년간 이어온 본 연재가 900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번 회부터 회차를 명시하겠습니다.

※ 챗GPT의 도움을 받아 만든 이미지입니다.


오래된 질문…이자는 과연 정당한 보상인가

이슬람 금융은 ‘리바(riba)’를 금지한다. 통상 이자로 번역되지만, 더 정확히는 실물거래나 위험 부담 없이 돈이 돈을 낳는 부당한 증가를 뜻한다. 기독교 전통에서도 이자는 오랫동안 의심의 대상이었다. 구약의 고리대 금지, 신약의 약자에 대한 무상 대여 윤리, 중세 교회의 이자 금지 교리는 모두 돈이 돈을 낳는 구조를 경계한 사례다. 오늘날엔 금융의 핵심이 된 이자이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돈을 빌려주고 더 많이 돌려받는 행위에 대한 질문은 계속 되고 있다.

“이자는 과연 정당한 보상인가?”

금융시스템 설계자 청와대 정책실장의 자기비판 왜?

그 오래된 질문이 지금 한국에서 다시 불거졌다. 지난 5월 1일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대한민국 금융 구조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글을 SNS에 공개했다. 이른바 ‘잔인한 금융’ 논란이다. 오늘이 6월 1일이니 꼭 한 달이 지났다. 현직 정책실장의 글에 금융당국과 금융회사들은 빠르게 반응했다. 미디어의 반응은 대체로 우려가 많았다. 신용위험에 따른 금리 차등, 즉 금융의 자기책임 원칙을 뿌리째 흔든다는 걱정이다. 위험한 차주에게 낮은 금리를 주면 역선택이 발생하고, 금융 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김 실장은 외환위기 이후 은행 건전성 규제, 신용위험 관리, 금융회사 구조조정, 금융지주 체제, 가계부채관리 등 금융의 역사를 직접 만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잔인한 금융”을 말한다면, 스스로 만들어 온 뭔가가 잘못됐다는 자기비판이다. “나는 공범”이라는 표현이 가볍지 않은 이유다. 김 실장이 자신의 글에 제기될 우려를 예상하지 못했을까? 사안을 좀 더 깊고 정교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민간기업인가 공적기구인가…은행의 특권들

금융의 간판은 은행이다. 은행만큼 공적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업종은 없다. 시장원리만으로 이런 보호는 설명이 안된다. 공적기능과 책임이 반드시 담보되어야 한다.

은행은 전 금융권을 통틀어 가장 높은 레버리지가 허용된다. 자산의 5~8%에 불과한 자기자본으로 거대한 부채를 일으켜 수익을 낸다. 부채 대부분은 수신으로 모집한다. 지급결제 기능의 근간도 은행 계좌와 은행망에 기대고 있다. 금융활동을 하려면 사실상 은행계좌가 필요하다.

예금자보호 장치에, 유사시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bail-out)할 수 있다는 믿음 등이 결합해 강력한 수신의 기반이 된다. 이는 자금시장에서 은행채를 발행하는 데 유리하게 작동한다. 은행은 중앙은행 유동성 장치에 접근할 수 있는 지위도 갖는다.

이 신뢰와 유동성 안전판은 은행이 이른바 만기불일치를 위험이 아닌 수익 기회로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은행의 주요 자금조달원은 예적금과 은행채다. 대부분 만기 5년 미만으로 상당수는 대출 만기보다 짧다. 최근에는 흔히 월급통장이라고 말하는 요구불예금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요구불예금은 수시로 자금을 옮길 수 있는 대신 이자율이 0.1% 안팎으로 아주 낮다. 은행 입장에서는 아주 소중한 저원가성수신이다.

은행은 이처럼 상대적으로 짧고 싼 돈을 조달해 만기가 긴 주택담보대출을 해준다. 태생적 만기불일치다. 그러나 은행은 콜 차입 등 단기자금시장에 접근할 수 있고, 필요할 경우 중앙은행 유동성 장치라는 안전판에도 접근할 수 있다. 만기불일치에서 생기는 유동성 공백을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메울 수 있는 수단이 다양하다.

은행이 돈 버는 법…위험은 넘기고 이익은 고정하고

장기 대출은 금리변동 위험관리가 중요하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은행의 장기대출을 모기지채권으로 유동화하는 시장이 발달했다. 고정금리 대출이 많은 이유다. 우리나라에서는 주택금융공사 대출이 이런 방식이다. 우리나라 시중은행들은 정기적으로 이자율을 조정하는 변동금리 대출을 압도적으로 선호한다. 이자율을 조정할 때는 시장금리(조달금리) 뿐 아니라 은행의 각종 비용(가산금리) 변동 분도 반영한다. 시장금리가 내려도 대출 이자율이 낮아지지 않을 수 있는 구조다.

은행 대출금리는 대체로 기준금리 또는 조달금리에 가산금리를 더하고 우대금리를 빼는 방식으로 정해진다. 조달금리는 은행이 돈을 가져오는 비용이다. 가산금리에는 업무원가, 신용위험 비용, 유동성 비용, 자본비용, 예금보험료, 목표이익률 등이 들어간다. 말은 복잡하지만 결국 은행이 영업하면서 필요한 비용과 위험의 상당 부분, 그리고 목표마진이 차주의 금리에 반영되는 구조다. 조달 비용뿐 아니라 은행의 자체 비용이나 목표이익률 변동도 가산금리를 통해 차주에게 전가된다.

오묘한 가산금리… 위험가격인가, 집단 보험료인가

금융의 온도를 결정하는 핵심인 가산금리가 등장했으니, 질문을 하나 해보자.

“가산금리는 개별 차주의 위험가격인가? 아니면 은행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집단 보험료인가?”

은행들은 신용등급 외에 자체 기준을 더해 대출금리를 산정한다. 상대적으로 거래실적이 많고 부실 가능성이 낮은 고신용자에게는 우대금리를 적용해 가산금리를 깎아준다. 레버리지가 클수록 돈을 벌 때 중요한 것은 높은 마진율보다 안정적인 마진 총량의 관리다. 마진율을 조금 낮추더라도 대출 규모와 거래 지속성이 받쳐주면 안정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다. 대출 한도가 적고 신용등급도 낮은 저신용자는 이런 혜택을 받기 어렵다. 이렇게 신용등급이나 재산, 소득에 따른 금리 차이가 더 커지게 된다.

은행의 위험관리, 평가인가 회피인가

은행을 공적시스템이 지원하는 이유는 자금 중개와 배분 기능을 갖기 때문이다. 은행이 담보나 보증을 바탕으로 단순 판매 형식으로 돈을 빌려준다면 공적 지원을 할 이유가 없다. 은행은 돈을 시장에 효율적으로 공급해야 한다. 달리 말해 돈을 빌리는 이의 신용이 과거에 몇 점인지 살피는 데서 멈추지 말고 얼마를 빌려 어디에 쓸 지, 그리고 그 돈이 어떤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는 지까지 따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은행은 위험관리를 더 잘하게 되고, 차주는 좀 더 합리적인 조건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자(interest)의 영어 어원은 ‘관심’이다. 돈을 쓰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이자의 본래 바탕이어야 한다. 우리나라 은행들은 위험을 가격에 반영한다고 하지만 실제 영업은 위험 평가보다 위험 회피에 가깝다. 신용점수가 높으면, 담보가 충분하면, 보증이 붙으면 잘 빌려준다. 이런 게 없으면 대출을 꺼리거나 금리를 크게 높인다.

은행 위기 3대 원인…거액대출·과잉탐욕·감독실패

저신용자 대출의 부실 확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 은행을 무너뜨린 것은 대체로 수 백만원, 수 천만원의 생계형 대출이 아니었다. 외환위기 때도, 저축은행 사태 때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때도 문제의 핵심은 거액 차주들에 대한 대규모 신용 공급과 금융회사의 위험관리 실패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담보비율 관리를 하지 못하고, 무리한 파생상품 투자로 부실을 키운 거대 금융회사가 근본 원인이었다.

2000년대 초 신용카드 사태도 언뜻 보면 소액대출 부실이 원인으로 보인다. 위기의 본질은 저신용 서민들의 탐욕 보다는 무분별한 신용공급을 방치하고 조장한 금융당국과 돈벌이에만 눈이 멀어 위험관리에 소홀했던 금융회사의 탓이 컸다. 우리나라에도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개인 금융시장이 열린 것이 이 때다.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을 걷는 과정에서 겪은 집단 시행착오였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것은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과도한 차입과 부실한 위험관리였다. 그 결과 부실해진 금융기관의 높은 조달비용과 구조조정 비용은 사회 전체가 감당했다. 외환위기 이후 무너진 금융기관을 살린 것은 그동안 제대로 은행 대출을 받아보지 못했던 국민들의 돈이었다. 공적자금이 투입됐고, 은행은 통폐합됐고, 지금의 거대 금융지주 체제가 탄생했다. 지금의 5대 금융지주 체제는 공고한 과점이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 통폐합과 금융지주회사 체제는 경영 효율과 건전성 강화를 명분으로 추진됐다. 은행들은 증권·보험·카드 등 2금융권 계열사까지 거느리는 거대 금융그룹으로 커졌다. 정부의 용인 없이는 불가능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효율이 높아진 만큼 금융의 온도도 함께 올라갔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은행 역할은 자금중개와 합리적 배분, 미래를 봐야

은행(bank)의 영어 어원은 이탈리아어 ‘방코(banco)’다. 긴 의자라는 뜻이다. 상인들이 앉아 어음을 결제하고, 환전을 돕고, 무역금융을 중개하던 곳이 은행의 출발이었다. 은행의 본래 기능은 거래의 신뢰를 만들고 자금의 흐름을 이어주는 일이었다. 이슬람 금융은 돈 자체에 대한 확정 이자를 금지했지만, 투자 결과의 배분인 ‘수쿠크(sukuk)’는 허용한다. 중요한 것은 그 철학이다. 종교가 경계한 것은 이자 자체가 아니라, 위험은 지지 않으면서 확정 수익만 챙기는 구조였다. 돈이 돈을 낳는 것이 아니라, 돈이 실물 활동에 투입되고 그 결과를 나누는 것이 금융이라는 생각이다.

현대의 은행은 순수한 사기업이 아니다. 자금 중개와 배분의 책임을 다하라고 공적 안전판 위에서 안정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도록 정부가 허가한 사업이다. 저신용자에게 무조건 낮은 금리를 주자는 뜻이 아니다. 위험을 무시하자는 말도 아니다. 위험을 더 정확하고 정교하게 보자는 뜻이다.

이 사람이 얼마를 빌려 어디에 쓰는지, 그 돈이 미래에 어떤 현금흐름을 만들 수 있는지까지 데이터와 기술로 정밀하게 따지는 것이 진짜 위험관리다. 사람과 기업의 미래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과거의 부실한 기록만 가격표로 바꾼 채 약자를 격벽 밖으로 밀어내는 금융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시스템의 특권을 사유화한 ‘잔인한 금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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