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선율 없는 ‘발레 아리랑’… 최수진·이루다, 절망 너머 연대를 춤추다 [인터뷰]

동갑내기 두 안무가가 만든 파격
6~7일 예술의전당 ‘발레축제’
“우리의 절망이 리듬이 될 때”


대한민국발레축제 기획 공연 이루다, 최수진 안무의 ‘발레 아리랑’ [대한민국발레축제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짙푸른 파도처럼 일렁이는 거문고의 선율 위로 좌절의 몸짓이 유영한다. 나아가려 하지만 가로막히고, 넘어서려 하지만 넘지 못하며 한계를 맞닥뜨린다. 주저앉고 쓰러지고, 그럼에도 서로 기대 다시 선다. 절망을 말하지만 비극에 머물지 않는 춤은, 거친 호흡과 솟구치는 에너지의 군무로 이어진다. 개인의 감정은 집단의 에너지로 확장하고, 침잠하던 정서는 온전히 분출된다.

서로 다른 색깔의 두 안무가가 하나의 작품에서 ‘따로 또 같이’ 만났다. 올해로 16회를 맞은 대한민국발레축제의 기획공연 ‘발레 아리랑’이다. 무대 위에선 단 한 소절의 ‘아리랑’ 가락도, 한 맺힌 구음도 들리지 않는다. 전통의 선율을 과감히 지워낸 자리에 들어선 것은 거대한 ‘벽’이 주는 절망, 그 벽을 깨부수기 위해 뭉친 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장장 6개월간 치열하게 고민한 ‘아리랑’의 정서와 메시지를 두 명의 스타 안무가는 ‘몸의 언어’로 풀어냈다. 1985년생 동갑내기 이루다, 최수진이 바로 그들이다.

작품이 작업 방식이 독특하다. 하나의 작품을 두 명의 안무가가 1, 2부로 나눠 안무를 맡았다. 개막을 앞두고 첫 리허설 현장에서 만난 이루다는 “처음엔 하나의 주제로 만든 분리된 작품, ‘더블 빌’ 같은 기획이라고 생각했다”며 “이젠 완전히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레 아리랑’은 전통 악기(거문고)와 신시사이저가 만나 현대적 미장센을 구현하는 무토(MUTO)의 박훈규가 연출을 맡아 대본을 썼다. 음악 역시 무토(박훈규, 박우재, 신범호, 홍찬혁)가 맡았다.

‘발레 아리랑’의 안무가 최수진 이루다 [대한민국발레축제 제공]


두 사람이 한 작품을 1, 2부로 나눠 안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른 색깔의 두 안무가, 각기 다른 무용수들이 둘로 나눠 출연하다 보니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는 고민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었다.

최수진은 “원래 세 개의 대본이 있었다. 그중 저희가 고른 대본이 ‘발레 아리랑’이었다”며 “12월에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1월부터 각자 캐스팅과 안무를 구상했다”고 지난 과정을 귀띔했다.

동갑내기 두 안무가, ‘아리랑’의 서사로 맞물리다


‘인연의 시계’는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10대 소녀 때부터 서로를 알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나란히 입학해 서로의 성장을 지켜봤다.

최수진은 “미국에서 돌아와 만든 첫 안무작에 (이)루다가 출연해 줬다”며 웃었다. 뉴욕의 시더레이크 컨템포러리 발레단(2008~2012) 활동을 마치고 귀국, 2013년 올린 ‘아웃 오브 마인드’(2013)에서다. 친구의 ‘첫 안무작’을 함께 해줄 만큼 의리를 빛냈지만, 정작 안무가로 먼저 첫발을 디뎠던 이루다(2010년 뉴욕 덤보 댄스 페스티벌 ‘블랙토(Black Toe)’)의 작품에 최수진이 선 적은 없다. “왜 난 안 불러주냐”고 최수진이 묻자, 이루다는 “너무 비싼 무용수”라며 웃는다.

두 사람의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엠넷 무용 오디션 프로그램 ‘댄싱9’을 통해서다. 이후 한국 무용계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한 두 사람은 지난 10여년간 각자의 영역에서 안무가로서 정체성을 견고히 쌓아왔다. ‘발레 아리랑’은 하나의 서사 안에서 두 안무가의 서로 다른 색채로 빚어낸 완결성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발레 아리랑’에서 이루다 안무가가 맡은 2부[대한민국발레축제 제공]


이루다는 “안무가로서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까지일지, 각자 다른 무용수를 데리고 어떻게 하나의 맥락을 만들지 고민이 컸다”고 말했다. 최수진 역시 두 명의 안무가가 ‘하나의 작품’을 엮어내는 것에 대한 걱정이 적지 않았다. 그는 “내 경우엔 솔로나 듀엣 위주의 내밀한 춤에 끌렸고, 루다는 강렬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군무를 생각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파트가 나뉘었다”고 설명했다.

서사를 이끄는 핵심 주인공은 무토가 반년 동안 공들여 만든 12개의 오리지널 스코어다. 거문고와 태평소 등 날 선 국악기에 모듈러 신시사이저의 전자음악,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어우러진 사운드는 그 자체로 춤을 리드한다. 최수진은 “음악을 들었을 때 이미 거대한 서사의 기승전결이 완성돼 있었다”며 “각자 취향에 맞는 곡들을 선택했고, 연출가님이 음악 안에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이어지도록 정교하게 배열해 주셨다”고 전했다.

2부의 음악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품은 타악 중심의 사운드로 안무가를 자극했다. 이루다는 “음악을 듣는 순간 장구와 타악의 장단이 끊임없이 뛰게 했다”고 돌아봤다.

두 안무가가 몸짓으로 정의한 ‘아리랑’


최수진의 ‘아리랑’은 인고의 시간을 건너온 저마다의 삶의 여정을 통한 ‘절실함’을 그린다. 아리랑에 담긴 한(恨)의 정서를 삶의 시련 속에서 피어나는 결핍과 절실한 몸짓으로 해석했다. 그는 “인간은 살아가면서 시련과 고통, 절망을 필연적으로 느끼지만, 그럴 때마다 또 다른 희망을 찾고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해 발버둥 친다”고 했다. 안무의 핵심 역시 ‘절망의 재해석’에 있다.

“절망이라는 단어는 강렬하게 다가왔지만, 절망을 슬픔으로만 두고 싶지 않았어요. 절망 역시 간절한 희망이 있기에 나오는 것이기에, 절망 안에서도 한끝의 희망, 먼 곳을 바라보며 다시 나아갈 수 있는 몸짓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최수진)

‘절실한 절망’을 미학적으로 승화하는 주역들은 평균 연령 40대의 스타 솔리스트들이다. 은퇴 후 복귀한 무용수부터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일으킨 무용수까지, 삶의 굴곡을 아는 이들의 몸짓은 1부의 서사에 깊은 밀도를 더했다.

대한민국발레축제 기획 공연 이루다, 최수진 안무의 ‘발레 아리랑’ 1부 [대한민국발레축제 제공]


최수진은 “워낙 각자 색깔과 기량이 뚜렷한 무용수들이라 이들을 하나의 작품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미션이었다”고 했다. 특히 신승원, 최지원 무용수는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대에 서고 있다. 무용수들의 몸을 깨우기 위해 최수진은 6개월 동안 연습 전 매일 1시간씩 직접 워밍업 바(Bar) 클래스를 진행했다.

“그 시간 덕분에 무용수들의 몸이 살아나고 자신감도 많이 생겼어요. 클래식 발레만 해오던 무용수들에게 에너지를 응축했다가 낚아채듯 뿜어내고, 남녀의 몸이 엮였다가 풀리는 컨템포러리 특유의 ‘밀고 당기기’를 요구했는데, 오래 연습한 작품처럼 너무나 노련하고 안정적으로 감정선을 이어가게 됐어요.” (최수진)

가장 먼저 탄생한 안무는 여성 무용수의 솔로 춤이다. 최수진은 이 곡에서 작품의 서사를 찾았다. 그는 “첫 곡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며 “처참하게 벽 속으로 모두 소모되고 흡수되는 슬픈 현실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끈질긴 생명력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발레축제 기획 공연 이루다, 최수진 안무의 ‘발레 아리랑’ 1부 [대한민국발레축제 제공]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것처럼 쓰러져 있는 몸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혹은 스스로의 의지로 다시 한번 깨어나 힘겹게 한 발을 내딛는 그 순간의 몸짓이야말로 진짜 아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최수진)

최수진의 ‘아리랑’이 내밀한 절망을 축적했다면, 이루다가 이어받은 ‘아리랑’은 집단의 강력한 에너지로 장벽을 깨부수는 ‘해소와 연대’의 무대다. 한국 무용수 3명, 현대 무용수 3명, 발레 무용수 7명 등 총 13명의 각기 다른 장르 무용수들이 모여 폭발적인 군무를 이룬다. 무대 뒤편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LED 벽은 이들이 넘어서야 할 숙명이자 대결의 대상이다.

이루다가 바라본 아리랑은 ‘한(恨)과 살을 푸는 과정’이다. 그는 “무토의 음악을 듣는 순간 직관적으로 ‘한풀이’를 떠올렸다”고 했다.

“무대 위에서 다 같이 방방 뛰며 풀어내는 ‘현대판 한풀이 파티’로 가야겠다 싶었죠. 록 페스티벌이나 클럽 파티처럼 인간이 본능적으로 에너지를 분출하며 해소하는 장을 만들고자 했어요.” (이루다)

2부 초반, 무용수들이 관객을 등지고 일제히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장면 역시 정교하게 계산된 안무다. 그는 “1부에서 느꼈던 절망감을 한숨 쉬듯 다 내쉬고 시작하자는 의도”라며 “한국 무용의 깊은 내공이 담긴 호흡을 발레리나들에게 이식해 숨을 깊이 쉬고 시작하고 싶었다”고 했다.

‘발레 아리랑’의 이루다 [대한민국발레축제 제공]


서로 다른 전공의 프리랜서 무용수 13명을 모아 군무의 톱니바퀴를 맞추는 과정은 아리랑 고개를 넘듯 ‘험난한 길’이었다. 이루다는 “한국 무용수들은 손동작과 손 모양을 가르쳐주고, 발레 무용수들은 한국 무용의 굴신을 연습하며 서로 채워나갔다”고 했다. 한국무용의 호흡, 발레의 정교한 테크닉, 현대무용의 자유로움이 어우러져 ‘변형된 강강술래’를 띠며 ‘온전한 해소’로 나아간다.

“예측가능하고 뻔한 한국적 그림은 피해 가고 싶었어요. 저게 발레야, 한국무용이야 싶을 정도로 흔히 보던 동작이 아니길 바랐죠. 시각적으로는 제 정체성이었던 ‘블랙’ 의상에서 시작해 희망과 승화로 나아갈수록 점점 ‘화이트’로 변화해요. 결국엔 백의민족의 색으로 돌아가,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거대한 벽을 깨부수고 액운을 털어내는 살풀이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확연히 다른 색깔을 지닌 1, 2부는 매끄러운 맥락으로 이어진다. 두 안무가는 작품을 하나로 묶어주는 가장 큰 매개체로 무대 위의 ‘벽’과 솔리스트 ‘최지원 무용수’를 꼽았다.

이루다는 “개인의 감정이 모여 집단의 감정이 되는 맥락 속에서, 작품 내내 존재하는 ‘LED 벽’이 전체 아리랑을 아우른다”고 짚었다. 1부의 무용수들이 벽 앞에서 절망을 느끼고 함몰된다면, 2부는 그 벽을 넘어서고 깨부수려는 집단의 에너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김주원 예술감독의 제안으로 투입된 발레리나 최지원이 있다. 이루다는 “1부 첫 장면에 등장했던 최지원이 2부 마지막 장면까지 등장해 하나의 흐름으로 돌아가는 수미쌍관의 구조가 완성됐다”며 만족감을 전했다.

‘발레 아리랑’에서 이루다 안무가가 맡은 2부[대한민국발레축제 제공]


최수진 역시 “오늘 전체적인 흐름을 쭉 보니 비로소 감정이 연결되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1부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뜻대로 되지 않는 해소되지 못한 감정선이라면, 2부로 갈수록 그런 것들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풀어내고 해소한다”며 “두 파트를 모두 보고 나니 비로소 우리가 말하는 진짜 ‘아리랑’이 느껴졌다”고 했다.

“안무가로서 돋보이는 서로의 정체성”… 존경과 신뢰


두 사람은 학창 시절부터 2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서로의 성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동료이자 열렬한 팬이다. 각자 만든 안무가 하나로 결합한 작품을 본 두 사람의 눈이 빛났다.

최수진은 “(이루다의 안무가) 정말 견고해졌다는 생각을 했다”며 “음악을 다 해석해서 한 동작 한 동작 촘촘하게 꾸려나간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루다가 애를 많이 썼다”고 했다. 그는 특히 “많은 인원의 무용수가 나와 한 명의 무용수처럼 에너지를 분출하는 군무를 보며,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2부에서 채워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며 “클래식 발레의 기본 라인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루다만의 특유의 움직임을 훌륭하게 그려냈다”며 박수를 보냈다.

‘발레 아리랑’의 최수진 [대한민국발레축제 제공]


이루다 역시 최수진을 향해 “그녀의 업적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며 경의를 표했다. 해외 유수의 컨템포러리 무용단에서 활약해 온 최수진의 몸 안엔 누구나 경험할 수 없는 춤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루다는 “클래식 발레 무용수들은 움직임의 범위가 넓지 않은 편인데, 수진이가 그들로부터 엄청난 발산과 텐션감을 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무용수들의 연기와 움직임에 밀당이 생겼다”며 “댄서에서 안무가로 넘어온 수진이는 아직 보여줄 게 너무 많은 사람이다. 국내에서 정말 독보적인 존재”라고 극찬했다.

저마다의 예술적 성취를 이뤄가는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충분치 못한 예산과 인프라 속에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드는 고충이 프리랜서 안무가에게 따라왔다. 최수진은 “프리랜서 안무가들은 무용수들의 시간을 맞추는 것부터가 전쟁”이라며 “그동안 안무를 하면서 직접 무대에 서야 해서 공연 날이면 패닉 수준이었는데, 이번에는 (김주원 예술감독이) 오롯이 안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 진짜 안무가로서 무용수들을 관찰하고 다듬는 귀한 경험을 했다”고 감사를 전했다.

이루다 또한 “(안무가는) 무용수들의 노동력과 시간, 열정을 사는 작업인데 예산 자체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 무용단을 운영하며 경영적인 어려움을 늘 느낀다는 그는 늘 일인다역을 해왔다. 안무는 물론 연출, 음악, 비주얼까지 관여하는 멀티테이너였다. 이번 작품에선 오롯이 ‘안무’에만 집중했다는 점에서 기존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역할이다. 이루다는는 “무대 연출이나 사운드를 직접 편집해야 했던 기존의 독립 작업과 달리, 이번에는 오롯이 동작과 안무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창작자로서 매우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했다.

두 안무가는 이 작품을 통해 ‘위로와 해소’의 한판 축제를 연다. 최수진은 “삶에서 누구나 절망을 느끼겠지만 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한 발짝 몸을 움직여 나가길 바란다”며 “절망은 굉장한 바람과 희망 때문에 오는 것이니 긍정적인 메시지로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의 절망이 리듬이 될 때’가 이 작품의 메인 문구예요. 해소할 거리가 없으면 방방 뛰지 못하듯, 절망과 아픔이 있어야 그것을 표출할 에너지가 생기잖아요. 부정적인 감정도 결국 우리를 움직이는 긍정의 힘이 될 수 있음을, ‘K-발레’의 신명 나는 움직임을 통해 직관적으로 느끼실 거예요.”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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