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토릭 넘어 산술적 효과로 이어져야
2030년까지 투자 3~4조달러 예상
‘쇼’로 안 끝나려면 투자 이행 관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닷새간의 짧은 방한 기간 동안 SK·현대차·LG·네이버 등과 만나 협력안을 쏟아냈다. SK하이닉스와 메모리반도체 장기공급계약을 체결하고 네이버·SK텔레콤과는 AI 팩토리를 함께 구축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과 LG그룹을 찾아선 로보틱스 협력안을 주로 논의했다.
한국을 찾은 첫날부터 “일거리를 들고 왔다”고 강조한 황 CEO는 떠나기 직전까지 한국이 미래 AI 투자처로 적격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빨리빨리’ 문화를 바탕으로 한국의 수용성에 AI 인프라 투자가 더해지면 엄청난 사업 기회가 창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방한 성과가 가시적인 결실로 이어질 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황 CEO는 한국에 깜짝 선물을 가져왔다고 했지만 이번 방한이 AI 인프라 기업으로 도약을 노리는 엔비디아의 의지와 맞물린 측면 역시 크기 때문이다. 황 CEO가 협력안을 내놓을 때마다 언급한 AI 팩토리가 이를 상징하는 사업이다.
▶“전세계가 지금껏 본 적 없는 거래”=지난 8일 저녁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코리아 AI 에코시스템 리셉션’을 마친 뒤 “우리는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업을 유치했다”며 “계약이 체결된 상태라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일반적인 거래 규모가 아닌 세계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수준의 거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향후 5년 동안 수천억달러 수익이 한국으로 유입될 것으로 전망한다”며 “그것이 우리의 선물이고 우리의 파트너십”이라고 강조했다.
황 CEO는 8일 열린 ‘코리아 AI 에코시스템 리셉션’ 전까지 국내 대기업을 찾는 숨가쁜 일정을 소화했다. 오전 9시 서울 중구 SK서린빌딩을 찾아선 SK하이닉스와 메모리반도체 공동개발을 위한 기술 파트너십을 발표하고 SK텔레콤과는 GW(기가와트)급 AI 팩토리를 구축하기로 했다.
곧바로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를 방문해 아이작 그루트(Issac GR00T) 기반 레퍼런스 로봇을 공동 개발하는 내용의 피지컬 AI 협력안을 공개했다.
이후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에선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만나 전북 새만금 AI 투자를 논의했고 경기 성남 네이버 1784 사옥으로 이동해선 오전에 엔비디아가 미디어브리핑을 통해 직접 발표한 AI 팩토리 투자를 재확인했다.
황 CEO는 9일 한국을 떠나며 이번 방한 핵심 성과 두 가지를 언급하기도 했다. SK하이닉스와 맺은 다년간의 메모리반도체 파트너십과 네이버·SK텔레콤과 체결한 AI 클라우드 파트너십을 콕 집어 강조했다.
▶AI 인프라 구축, 빅테크서 모든 기업으로 확장=SK하이닉스와 맺은 2년 이상의 메모리반도체 장기공급계약(LTA)이 엔비디아 공급망 관리 차원에서 중요하다면 네이버·SK텔레콤이 발표한 AI 팩토리 구축은 엔비디아 미래 성장 동력 측면에서 중요하다.
이를 두고 젠슨 황의 이번 방한이 신성장동력을 알리기 위한 로드쇼였다는 시각도 있다. 황 CEO는 한국을 찾기 직전 대만에서 열린 ‘GTC 타이베이 2026’ 기조연설을 통해 AI 팩토리·오픈소스 AI 모델 분야에서 파트너들과 통합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한국에서 네이버, SK텔레콤 같은 핵심 파트너를 확보한 셈이다.
엔비디아의 데이터센터 솔루션인 AI 팩토리는 급증하는 컴퓨팅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운영 모델이다. 엔비디아 DSX 플랫폼을 기반으로 설계부터 시뮬레이션, 인프라 소프트웨어, 칩, 운영까지 풀스택(Full-Stack)으로 제공한다.
엔비디아는 GPU(그래픽처리장치) 공급을 넘어 AI 인프라 기업으로 도약을 꾀하고 있다. 인프라 시장의 잠재 성장성도 크다고 여긴다. 지금까지는 빅테크 같은 하이퍼스케일러만 AI 인프라에 투자했다면 이제는 모든 기업이 이를 갖출 것이란 분석이다.
지난달 2027년도 1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 콜에서 콜렛 크레스 엔비디아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에이전트 AI가 모든 사업에 확산됨에 따라 AI 인프라 투자는 2030년까지 연간 3조~4조달러 규모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네이버와 SK텔레콤의 AI 팩토리 구축은 이 같은 전망에 부합하는 사례다. 두 회사는 이르면 내년부터 AI 팩토리 사업화를 예상하고 있다. 네이버는 사업 초기 리스 형태로 아시아 권역에서 200MW 규모 용량을 확보하고 2030년까지 1GW 인프라를 확보할 예정이다.
황 CEO가 1GW급 데이터센터 구축에 600억달러(약 90조원)가 필요하다고 한 만큼 추후 조달 필요성까지 거론된다. 네이버는 우선 10억달러 이상을 출자하고 전략적파트너(SI)가 같은 금액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SK텔레콤 역시 내년 AI팩토리 첫 가동을 목표로 한다. SK텔레콤과는 5GW 규모 AI 팩토리를 구축할 예정이다.
▶배경훈 부총리 “쇼만 하지 말고 투자해달라”=소프트웨어 협력안도 엔비디아 플랫폼 경쟁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결과물이다.
LG그룹이 택한 아이작 그루트는 엔비디아가 지난해 공개한 세계 최초 개방형 휴머노이드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이다. LG그룹은 자율주행 플랫폼 ‘드라이브 하이페리온’을 접목해 모빌리티 AI 시스템을 고도화하기로 했다.
황 CEO는 현대차를 찾았을 때도 보스턴다이내믹스 로봇개 ‘스팟’과 자율주행 모빌리티 플랫폼 ‘모베드’를 직접 보면서 자율주행·로보틱스 협업에 관심을 보였다. 엔비디아는 오픈모델 ‘알파마요’를 통해 자율주행 기술을 지원한다.
다만 이들 사업 외에 더욱 구체화된 투자 계획은 없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새만금 투자 제안에 황 CEO가 화답하며 새만금을 ‘AI 밸리’라고 칭했지만 아직까지 가시화된 내용은 드러나지 않았다.
정부 차원에서도 이번 방한 성과가 구체화될 수 있도록 황 CEO에게 직접 요구하기도 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 8일 ‘코리아 AI 에코시스템 리셉션’ 행사에서 “한국에서 쇼(SHOW)만 하지 말고 투자도 해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배 부총리는 “AI 생태계 투자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기로 했다”며 “한국이 GPU의 최대 구매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엔비디아도 한국 정부와 함께 우리 AI 생태계에 투자를 좀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정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