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분·물리학이론 걸림돌 안됐다…‘인터스텔라’ 이유있는 흥행 돌풍

[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여름 극장가를 ‘명량’이 달궜다면, 겨울로 향하는 비수기 극장가는 ‘인터스텔라’(감독 크리스토퍼 놀란ㆍ수입/배급 워너브러더스코리아)가 잡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인터스텔라’는 개봉 12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질주 중이다. 169분에 이르는 러닝타임도, 난해한 물리학 용어도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특히 공상과학(SF) 장르의 외화가 국내 극장가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킨 것은 이례적인 일. 전 세계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았던 ‘그래비티’(2013)도 국내에선 관객 수 320만 명에 그쳤다.

일각에서는 놀란 감독의 이름값을 이유로 든다. 하지만 그가 대중적인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온 감독은 아니기에 이같은 흥행을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못하다. 과거 놀란의 국내 개봉작 최종 스코어는 ‘다크 나이트’ 408만 명, ‘인셉션’ 592만 명, ‘다크 나이트 라이즈’ 639만 명 수준이다. 성공적인 흥행 성적이지만, 1000만 관객까지 내다보는 ‘인터스텔라’의 관람 열풍과는 온도차가 있다. ‘인터스텔라’가 국내 관객들을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볼 영화’ 없던 비수기 극장가 덕?=‘인터스텔라’의 흥행 이유에 대한 관객들의 분석은 ‘극장에 볼 영화가 없으니 당연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인터스텔라’의 개봉 당시 경쟁작들의 면면을 보면 체급 차이가 상당했다. 상업영화는 한국영화 ‘패션왕’이 유일했고, ‘현기증’, ‘다우더’ 등 저예산 영화들 정도가 가세했다. ‘인터스텔라’와의 경쟁에 겁을 집어먹은 작품들이 정면 대결을 피한 결과이기도 했다.

덕분에 ‘인터스텔라’는 개봉 첫 주 2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관람객들의 입소문은 빠르게 번져나갔고, 이는 80% 대를 넘어서는 예매점유율로 드러났다. 일단 흥행에 불이 붙으니 개봉 2주차 신작들도 맥을 추지 못했다. ‘카트’는 한국영화로선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인터스텔라’의 흥행세를 꺾기엔 역부족이다. 할리우드 영화 ‘아더우먼’, ‘울브스’ 등은 누적 관객수 10만도 달성하지 못한 참혹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다만 개봉 3주차엔 변수가 있다. 전 세계 1조5000억 원의 수익을 거둔 ‘헝거게임’ 시리즈의 신작 ‘헝거게임: 모킹제이’와 브래드 피트 주연의 전쟁 대작 ‘퓨리’가 동시 출격하는 것. 블록버스터 두 편의 영향인지 19일 오전 기준 ‘인터스텔라’의 예매점유율은 70%대로 다소 주춤한 상황이다.

▶‘스펙터클’과 ‘드라마’의 조화=국내 극장가 역대 흥행작들을 보면 대부분 ‘스펙터클’과 ‘드라마’가 있었다. 외화 가운데 박스오피스 1위작인 ‘아바타’(누적관객수 1362만 명)는 상상력 넘치는 스토리도 빛났지만, 당시로선 놀라웠던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이 흥행의 일등공신으로 작용했다. 한국영화 역대 흥행작 가운데 ‘괴물’, ‘해운대’, ‘명량’ 등은 시각적인 볼거리와 드라마적인 요소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사례였다.

‘인터스텔라’ 역시 두 가지 흥행 코드를 모두 잡았다. 그간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들은 영화적 재미와 여운은 있었지만 눈물샘을 자극하진 않았다. ‘인터스텔라’는 놀란의 작품으로선 이례적으로 감성을 건드리는 요소가 풍부하다. 지구상에 가족을 두고 온 아버지의 부정(父情),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하는 딸의 이야기, 인류 구원이라는 목표와 개인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대원들의 모습이 관객의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낸다. 신비롭지만 차가운 우주 공간에서, 보편적이고도 따뜻한 감성을 담아낸 놀란의 ‘한 수’가 적중한 셈이다.

정지욱 평론가는 “흥행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족’이라는 코드를 넣은 것이 SF영화에 대한 거부감을 해소했다고 볼 수 있다”며 “서양의 이야기지만 정서는 동양적인 부분, 영화 전반부 폴터가이스트(초자연) 현상이 아버지의 사랑이나 애정으로 해석되는 것이 재미있는 발상이면서 관객들에게 따뜻함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전했다. 

▶ 관객들의 ‘지적욕구’ 저격…재관람 열풍까지=‘인터스텔라’의 흥행과 관련해 인터넷에선 재미있는 광경이 목격된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인터스텔라를 보기 전 예습할 10가지’, ‘인터스텔라에 담긴 물리학 상식’과 같은 게시물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 심지어 한 포털사이트의 문답 코너에는 ‘물리학 이론을 모르고 인터스텔라를 봐도 될까요?’와 같은 질문이 올라왔다. 관객들을 지레 겁먹게 하는 각종 게시물이 오히려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급기야 영화에서 난해하게 느껴졌던 이론적인 부분 때문에 재관람 열풍까지 일고 있다. 일각에선 ‘인터스텔라’의 흥행 이면엔 관객들의 지적 허영이 한 몫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이 같은 관점도 부정할 순 없지만, 지적 허영과 호기심의 경계를 구분 짓기란 모호하다. 관람 동기가 어쨌건 관객들의 지적 욕구를 정확하게 저격, 비수기 극장가를 사로잡았다는 점에서 ‘인터스텔라’의 의미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신촌의 한 극장에서 만난 20대 여성 관객은 “같은 돈 주고 뻔한 스토리에 억지 웃음이나 눈물을 강요하는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이 어디 있겠느냐”며 “‘인터스텔라’는 극장을 나선 뒤에도 여러 번 곱씹을 수 있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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