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에 목마른 국민…이순신 통한 대리만족

“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조선 정조(正祖) 19년(1795년)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행록에 실린 이순신 장군의 문장은 단호하다. 그러나 영화 ‘명량’을 기점으로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치르기 전 조정에 올린 장계에 담긴 이 문장의 행간을 읽는 대중의 시선은 다소 복잡해졌다.

‘명량’이 15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뒀다. 올 초부터 정치권의 분열, ‘관피아’로 대표되는 부패구조, 책임의식 실종,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향한 부채의식 등으로 피로와 무력감에 휩싸인 국민은 리더십을 갈망했다. 난세가 영웅을 부르듯, 이런 시점에 민족 최대의 영웅 이순신이 소환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터이다. 다만 영화 속 이순신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각인된 범접하기 어려운 무패의 ‘영웅’이 아니었다. 영화 속 이순신은 절망에 가까운 현실에 놓여 끊임없이 고뇌하고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과 먼저 싸워야했던 외로운 ‘사람’이었다.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며 울돌목으로 나아가는 영화 속 12척의 배는 너무도 작아 보여 관객들의 가슴을 사무치게 만들었다. 이 영화를 통해 대중은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우뚝 서있던 이순신을 조금이나마 비슷한 눈높이에서 마주하고 연민할 수 있게 됐다.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명량’의 흥행 돌풍은 소통과 솔선수범의 리더십에 목마른 국민의 정치권을 향한 우회적인 질타라는 소박한 수준의 분석 외에는 설명이 어렵다. 300척의 왜선을 12척의 배로 세운 일자진(一字陣)으로 맞이해 거둔 승리가 여전히 학계의 미스터리이듯, ‘명량’의 흥행 원인을 기술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현재로선 의미 없어 보인다. ‘명량’을 둘러싼 논의가 흥행 돌풍만큼 뜨겁지 않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평론가들 역시 대리만족 외엔 이렇다 할 흥행 원인을 꼽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제작한 장대한 액션에 불과할 뻔했던 영화를 화제의 중심에 설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은 전적으로 이순신으로부터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순신은 해전을 승리로 끝낼 수 있었던 비결을 묻는 아들 이회의 질문에 “천행(天幸)이었다”며 “그 천행은 울돌목 회오리가 아니라 백성이었다”고 대답한다. 이는 국민이 지금 정치권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들을 하나로 요약해 들려준 명대사였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 정치인들이 앞 다퉈 ‘명량’을 감상하고 관람평을 내놓고 있으나, 국민은 그 진정성에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 ‘명량’의 흥행이 길어질수록 정치권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더욱 짙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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