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칼럼] ‘사이다’가 필요하다면 투표해 – 정덕현 문화평론가

속 시원한 한 방을 담은 이른바 ‘사이다’ 콘텐츠들이 넘쳐난다. JTBC <욱씨남정기>라는 드라마는 대표적이다. 하청업체로 늘 당하기만 하고 살아온 중소기업 러블리 코스메틱이 황금화학이라는 대기업의 갑질을 버텨내며 생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과정은 실로 보는 이들조차 울화통이 터지는 상황들의 연속이다. 하청하던 제품을 주문했다가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도 하고, 아예 하루아침에 계약을 끊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높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자체 개발한 화장품의 미투 제품을 만들어서 진짜를 카피 상품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물론 이건 극화된 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갑과 을의 관계가 형성된 대기업과 하청업체의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런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고구마’ 현실에 이 드라마는 사이다 같은 속 시원한 한 방을 보여준다. 러블리 코스메틱으로 스카웃된 옥다정(이요원)이라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은 갑질 하는 황금화학 상무에게 오히려 계약 해지를 통보한다.

SBS 드라마 <돌아와요 아저씨>에는 일에만 빠져 만년과장으로 살다 죽게 됐지만 역송 체험으로 능력과 권력을 모두 가진 점장으로 다시 살아 돌아온 이해준(정지훈)이 등장한다. 늘 을의 입장에서 살아왔지만 갑의 위치에 서게 된 그는 직원들 입장에서 속 시원한 사이다 행보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백화점 갑질 모녀 사건을 풍자한 대목은 대표적. 주차요원의 따귀를 때리는 VIP 고객에 맞서 이해준은 시원한 한 방을 날려준다.

큰 화제를 남기고 종영한 tvN 드라마 <시그널> 역시 사이다 드라마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미제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수사해 결국 진범을 찾아내는 형사들의 진심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에 절절한 통쾌함을 안겨줬다. 잘 만들어진 드라마지만 그것이 드러내주는 답답한 현실과 그걸 뒤집는 사이다 전개가 하나의 판타지를 만들어내면서 생겨난 결과다.

KBS 월화드라마 <동네변호사 조들호> 역시 사이다 드라마로서의 면면을 보여준다. 잘 나가던 검사였지만 검찰 안의 비리를 견디지 못하고 버티다 결국 나락으로 떨어진 조들호(박신양)가 노숙자 신세를 전전하다 각성하고는 억울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변호인이 된다는 이야기. 권위를 찾아보기 힘든 이 특별한 변호인이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시청자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시청률도 2회 만에 11.4%로 꽤 높은 편. 여기에도 역시 고구마 현실에 갈증을 느끼는 시청자들의 사이다를 기다리는 정서가 어른거린다.

‘사이다 드라마’들이 넘쳐나고 또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건 당연하게도 우리네 현실이 고구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번쯤 생각해봐야할 문제가 있다. 사이다 드라마는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지만 그것만으로 고구마 현실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이다 드라마의 대리 충족의 효과가 오히려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를 누그러뜨릴 수도 있지 않을까. 도올 김용옥은 <차이나는 도올>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청춘들에게 “투표하지 않으면서 헬조선 운운할 자격 없다”고 일갈한 바 있다. 사이다 드라마도 좋지만 나아가 우리는 사이다 현실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