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널’은 배우 하정우(38)의 원맨쇼다. 그 자신도 ‘인생연기’를 펼쳤음을 알고 있었나 보다. “허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특유의 너스레를 떨었지만 자신감이 엿보였다.
영화에서 하정우는 무너진 터널 아래서 구조를 기다리는 평범한 남자를 연기했다. 120분이 넘는 상영시간 중 70 퍼센트 이상 하정우가 홀로 스크린을 채운다. 돌덩이들로 포위된 컴컴한 터널 안에서 보이는 건 그뿐이지만, 지루하거나 지겹지가 않다. 순발력 있는 애드리브나 제한된 공간에서 재치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그의 연기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 |
| [사진= 영화 ‘터널’에서 홀로 무너진 터널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는 정수 역을 맡은 배우 하정우. 그는 “연기 이외에도 조명이나 소품 등에 신경을 많이 쓴 영화”라고 ‘터널’을 소개했다. 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
전작이었던 ‘아가씨’는 시나리오의 토씨 하나까지 제한된 연기를 요구했다면, ‘터널’ 촬영은 배우에게 훨씬 많은 자유가 주어진 작업이었다.
“오랜만에 거칠게 한 덩어리씩 연기한 느낌이에요. 처음부터 시나리오에 구애받지 않고 즉흥연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김성훈 감독과 하고 촬영에 들어갔어요. 카메라 앞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대로, 불쑥 올라오는 감정과 생각대로 말을 뱉는 건 짜릿한 경험이었죠.”

그의 이야기대로 ‘터널’에서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내는 장면 중 많은 부분은 애드리브로 탄생했다. 터널 안에서 자신의 차 밖으로 ‘탐험’을 나갔다 와서는 “아, 집에 돌아왔다”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뱉은 말이나, 생수가 다 떨어져서 소변을 마시면서 “이건 오렌지주스야”라고 자기최면을 거는 말 등이다. “객석에서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오더라”라고 고무된 소감을 말하더니, “우리가 예상했던 코미디 포인트가 관객 반응과 맞아떨어져서 짜릿했다”고 이야기했다.
![]() |
| [사진= 영화 ‘터널’에서 홀로 무너진 터널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는 정수 역을 맡은 배우 하정우. 그는 “연기 이외에도 조명이나 소품 등에 신경을 많이 쓴 영화”라고 ‘터널’을 소개했다. 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
영화를 보면서는 그가 연기한 ‘정수’가 하정우인지, 하정우가 ‘정수’인지 한없이 겹쳐져 느껴지기도 한다.
“캐릭터를 만들 때, 그냥 내가 그 안에 들어가서 내 말투를 쓰고 행동을 해야겠다는 접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정수가 터널 안에서 쉽게 안정을 찾고 버티려고 노력하는 캐릭터도 만들어진 거고요. 절망만 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의 이야기는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저도 슬퍼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고요.”
![]() |
| [사진= 영화 ‘터널’에서 홀로 무너진 터널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는 정수 역을 맡은 배우 하정우. 그는 “연기 이외에도 조명이나 소품 등에 신경을 많이 쓴 영화”라고 ‘터널’을 소개했다. 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
작은 세트장에서 혼자서만 연기해야했기 때문에 상대 배우로부터 주거니 받거니 하는 리액션이 있을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주변 소품이나 미술, 세팅에 집착했다.”
“무거운 돌을 있는 힘껏 밀어내지만 이게 안 움직여야 하는데, 내가 밀었더니 움직이는거예요. 손이랑 팔에 핏줄이 서야 실감이 나는데 가짜니까 그러지도 않는 거죠.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세트장의 차 천장이 스티로폼인 게 티가 난다, 등등…. 촬영 멈추고 보강공사 하고, 다시 촬영하고, 그렇게 주변 상황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영화가 공개되고 나서는 “엔딩크레딧에 ‘조명보조’로도 하정우 이름을 넣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입에 물거나 손에 들고 비춘 플래시 불빛이 여러 장면에서 유일한 조명 효과였기 때문이다.
“제가 비추는 곳만 카메라에 담기는 거예요. 그러면 제 얼굴이 안 보이잖아요. 조명감독님이랑 상의를 많이 했죠. ‘정우씨, 플래시를 좀 비틀어서 얼굴을 보이게 해야 돼요, 빛을 반사시켜서 바운싱을 만들어 보세요’ 등등요. 조명 신경 쓰랴, 연기하랴 힘들었죠.”
현장에서 배우로서의 역할 이상으로 소품도, 조명도, 혼자 연기하는 장면에서는 ‘셀프 연출’까지 종횡무진이었다. 그도 이제 장편영화 두 편(‘롤러코스터’, ‘허삼관’)을 만든 연출가여서 가능했던 일일까. “아무래도 연기 이외의 것들도 많이 신경 쓰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제 기분만 챙길 수는 없는 거니까. 제가 감독을 하면서 주연배우가 현장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였었어요. ‘무슨 문제가 있나, 뭐가 불편한가’ 계속 살피게 되고요. 그러니까 제 스스로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과의 앙상블이나 컨디션을 챙기려고 해요.”
그는 자신의 세 번째 연출작이 될 ‘코리아타운’(가제)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중이다. “얼렁뚱땅 잡으면 2년 후쯤 개봉할 것 같다”며 “시나리오 작업을 정말 많이 할 거고 준비를 정교하게 하고 싶다”고 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완전히 재밌다’라고 완벽하게 차오를 때까지 준비할 생각이에요.”
10일 같은날 개봉해 빅매치를 벌이는 ‘국가대표 2’와 인연도 깊다. 그가 출연했던 시리즈 1편 ‘국가대표’(2009)이 800만 관객을 모아 흥행하면서 속편인 ‘국가대표 2’의 제작도 가능해졌기 때문. ‘국가대표 2’의 오프닝 장면은 스키점프대에 오른 하정우의 얼굴로 시작하기도 한다.
“경쟁 치열한 여름방학 시즌에 둘 다 배치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영화만의 장점, 힘과 매력이 있죠. 좋은 영화는 관객이 알아줄 것이고, 재밌지 않은 영화는 관객이 외면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쉽게요.”
그는 “나이를 잘 먹으면 연기에 설득력이 생길 것 같다”고 말했다.
“제가 ‘멋진 하루’를 삼십 대 초반에 했고 ‘터널’을 삼십 대 후반에 했잖아요. 같은 하정우라 해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거에요. 얼굴에 주름도 생겼을 거고 눈빛도 달라졌을 거고. 조금 더 저라는 사람의 느낌을 봐 준다면 좋겠어요. 나이를 잘 먹으면 내공이 채워질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