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소리로 듣는 한 편의 ‘전쟁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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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비나이 ‘적벽’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공명이 나를 속였다! 이 융동(隆冬, 한겨울) 때에 동남풍이 있을소냐” (‘오강귀도’ 중)
음력 11월, 북서풍이 몰아치는 적벽의 강가. 조조의 함대를 치기 위해 남동풍을 간절히 원한 주유에게 ‘천문을 읽는 자’ 제갈량이 공들여 신기를 부린다. 뒤늦게 알아차린 주유의 분노. 지략가들의 생존 게임이 일촉즉발의 추격신으로 이어진다. 뒤쫓는 자와 도망치는 자의 숨 막히는 거리두기다.
북소리 같은 드럼 소리가 심장을 타격하고, 거문고는 사정없이 내달리며 금속성 노이즈를 만든다. 잡히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절체절명의 위기. 윙윙거리는 일렉트로닉 기타에 날카로운 비명 같은 해금이 더해지니 이곳이 바로 맹렬한 기세로 쫓고 쫓기는 오강 한복판이다.
폭풍이 휘몰아친다. 사선으로 도열한 잠비나이의 다섯 멤버 머리 위로 쉴 새 없이 붉고 희고 푸른 레이저가 내려온다. 내달리는 음악 안엔 오강의 물살이, 주유의 군사 서성과 정봉의 살기가, ‘민중의 영웅’ 조자룡의 날렵한 화살촉이 실린다. 판소리 ‘적벽가’는 한 겹 한 겹 정교하게 쌓아 올린 ‘소리의 집합체’로 다시 태어났다. 판소리는 거들 뿐 거문고 해금·드럼·기타·베이스·피리 등 동서양의 악기가 만들어낸 소리는 전쟁의 참화를 고스란히 그려냈다. 포스트 록밴드 잠비나이의 ‘적벽(Red Cliffs)’(2월 27~28일, 아르코예술극장)이다. 일찌감치 티켓이 팔려나가 1, 2층까지 가득 메운 관객들은 공연을 마치자 “잠비나이가 잠비나이 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알고 보니, 제가 7년 전에 소리꾼 오단해씨에게 적벽가로 전투를 다루는 음악을 하자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잠비나이(이일우·김보미·심은용·유병구·최재혁)와 판소리의 만남은 좀 의외다. 이 밴드의 역사가 기존의 것을 답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리 연주자이면서 일렉트로닉 기타를 자유자재로 다뤄 ‘기타리스트’로 불리기도 하는 이일우는 최근 헤럴드경제와 만나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판소리를 재해석하는 것을 보고, 전공자로서 우리도 한번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선택은 탁월했다. 포스트 록 밴드에겐 판소리 다섯 바탕 중 가장 ‘스펙터클’한 전쟁 서사를 다루는 ‘적벽가’는 궁합이 좋았다. 이일우는 “‘춘향가’는 두 번째 달이, ‘수궁가’는 조금 다르지만 이날치가 해왔기에 다른 판소리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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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비나이 리더인 이일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어릴 적부터 ‘삼국지 마니아’였다던 이일우가 이 아이디어를 구상한 것은 사실 7년 전이었다. 이번 공연에 함께 한 소리꾼 오단해에게 이미 2019년쯤부터 ‘적벽가’의 전투 장면을 음악으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삼국지를 워낙 좋아해 게임, 영화와 같은 비주얼에 큰 영향을 받았다”며 “이를 영상과 조명을 녹여 다크 포스트 판소리로 만들어보고자 했다”고 했다. ‘적벽’의 장르를 ‘다크 포스트 판소리’로 삼은 것은 “가족 간의 이야기를 담은 ‘심청가’, 연인의 이야기인 ‘춘향가’와 달리 워낙 무거운 전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잠비나이의 ‘적벽’은 ‘삼국지연의’ 속 정수라 할 수 있는 대목들을 발췌해 재구성했다. 이일우는 “삼국지 마니아들은 제갈량(공명)이 오나라에 들어가 ‘적벽화전’까지를 삼국지의 최고봉으로 본다”며 “공연에서도 제갈량이 오나라에 들어가고, 삼국의 정세를 파악해 계책을 부리고, 적벽대전이 벌어지는 장면으로 구성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우리 판소리가 더한 ‘민중의 이야기’를 되살려 구슬픈 파동을 살린다.
이일우가 만든 ‘적벽’의 70분은 한 편의 전쟁 영화였다. 판소리에 재즈 코드를 넣었고, 전투 장면을 청각화해 ‘전쟁 사운드’를 만들었다. 소리꾼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역시 비장미를 만드는 하나의 소리일 뿐 각각의 대목을 온전히 이해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 다섯 연주자의 악기가 때론 등장인물이 되기도, 때론 활과 칼 같은 무기가 되기도, 때론 분위기가 되기도 하며 ‘전쟁 레퀴엠’을 쓴다.
가장 염두한 것은 ‘사운드의 직조’였다. 전쟁 상황을 그려내면서도 전쟁의 양면성을 표현하기 위해 오감이 동원됐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다섯 멤버의 연습 과정이 흥미롭다. 이일우는 “정말 영화를 찍는 거 같았다”며 웃었다.
“거기 해금, 자 지금 화살 날아와, 화살이 수십 개가 아니라 수천 개야. 여기서 칼 찔린다, 거문도도 같이 찔러, ‘빡’! 드럼 지금 땅에 화살이 박혀. 바바바바바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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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비나이 ‘적벽’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총 9곡으로 구성한 ‘적벽’은 판소리에서 필요한 대목을 발췌하고, 음악을 만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눈으로 그리듯 입으로 설명하면, 각자의 악기에서 최정점을 찍은 네 연주자는 완벽 그 이상의 비르투오소(virtuoso, 기교가 뛰어난 음악가)를 뽐낸다. 웃어넘길 수도 있는 묘사 장면이나 멤버들은 시종일관 진지하다. ‘소리의 질감’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일우는 “연주자들이 직접 화살이 되고 칼이 돼 관객의 청각을 찔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판소리는 본래 서양악기의 박자와는 다른 장단을 쓰는 만큼, 잠비나이의 ‘적벽’은 동서양 장단이 통합된 용광로가 됐다. 이일우는 “판소리의 장단과 드럼의 리듬이 따로 존재하며 공존한다. 판소리는 판소리의 장단으로 가고, 연주자들은 연주자들의 박자로 가는 방식을 썼다”고 말했다. 스스로는 “아직 내공이 부족해 한국 장단을 서양 악기로 세련되게 표현하기가 힘들었다”고 하지만, 다섯 명의 연주자는 따로 노는 박자를 정확히 계산해 고난도의 연주 실력을 발휘한다.
잠비나이는 이미 10여년 전 전통악기를 뛰어넘는 주법으로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왔다. 그럼에도 이번 ‘적벽’을 통해 청각적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앉어 죽고 서서 죽고 울다 웃다 죽고 밟혀 죽고 맞어 죽고, (중략) 눈 찔리고, 배 찔리고 등 찔리고 뿌러지고 자빠지고 찢어지고” 살아남는 자 하나 없는 비극적 ‘적벽화전’에서 해금은 오장육부를 찢어발기고, 거문고는 백성과 병사의 심장과 머리통을 관통하는 활이 된다.
잠비나이는 전쟁을 단지 영웅담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끝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비극”이라며 “의도적으로 전쟁으로 인한 슬픔의 메시지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을 미화하고 싶진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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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 록 밴드 잠비나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죽음으로 폐허가 된 ‘붉은 강’은 영혼이 떠오르는 비극을 그리며 마무리된다. 무기가 된 해금은, 이내 민중의 비명으로, 울부짖음으로 치환된다. 굉음처럼 포효하던 악기들이 모두 멈추고, 마지막 순간 연약하게 내리긋는 선율은 못다한 말이 남은 누군가의 연약한 신음인 듯 들린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참화가 이어지는 지금, 잠비나이가 ‘적벽’을 선택한 이유다.
“음악이나 예술이 반드시 이 시대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유달리 전통 쪽에선 너무 시대를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답답하더라고요. 일부러 의도하진 않았지만, 넌지시 전쟁의 비극을 보여줘 비참함과 슬픔을 보여주고, 시대정신을 간접적으로라도 담아보고 싶었어요.”
‘적벽’은 음악으로 보는 전쟁이었다. 비극은 시대를 넘어 현재로 당도했다. 청각적 상상력은 시각보다도 압도적이었다. 각각의 악기는 전쟁터의 병사와 영웅이 됐고, 화마를 뒤집어쓴 대전 속 공기와 강바람, 물결 소리와 안개를 그렸다. 저마다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음형은 손에 잡힐 것처럼 형상을 만들고, 눈에 보일 것처럼 이미지를 그렸다. 장면을 상징하는 영상과 조명의 조화가 더해지니 전쟁 전야와 전쟁 중의 암울함과 긴박감이 목 놓아 소리를 지른다. 과연, 잠비나이다웠다.
이일우는 “7년 전 ‘적벽’을 구상할 때도 완전히 전쟁터로 만들어버리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며 “판소리를 음악 코드에 얹는 순간 박제가 되는 느낌이 있는데, 그것과 무관하게 노이즈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잠비나이의 탄생은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01학번 동기 이일우(기타피리태평소), 김보미(해금), 심은용(거문고)이 주축이 돼 태어났고, 2010년 8월 첫 EP ‘잠비나이’로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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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비나이 ‘적벽’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이들은 전통 음악계의 이단아이자, 한국 대중음악계의 신성이었다. 세 연주자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잠비나이가 만들어가는 음악은 늘 ‘경계 밖’에 있었다. 홍대 인디신에서도 이들의 등장은 적잖은 충격이자 파격이었다. ‘적벽’ 역시 그 연장선이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적벽’이 있었지만, 가장 전위적이며 급진적인 ‘적벽’을 완성했다.
전통의 세계에서 성장한 연주자들의 ‘전통의 경계’를 박차고 나온다고 해도 이들에겐 늘 전통, 크로스오버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잠비나이는 멤버 세 사람이 전통악기 연주자임에도 이들의 장르적 정체성은 ‘포스트 록’으로 안착했다. 이일우는 “국악기로 전통을 고집하지 않고, 국악기가 낼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소리를 찾아온 것이 정체성이 됐다”고 봤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 무대는 잠비나이를 명실상부 세계적인 밴드 반열에 올려놓았다. 멤버들 역시 당시를 잠비나이 밴드사의 ‘변곡점’으로 꼽는다. “속초에 머물며 평창을 오가는 동안 바닷가에서 멤버들과 보낸 즐거운 시간”이 더 돈독한 관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밴드가 10년 이상 멤버 교체도 없이 이어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일우는 “처음엔 맨날 싸우면서 음악을 했는데 이젠 서로가 서로의 음악과 성장을 인정하고 양보해 준다”고 했다. 태생적으로 연주자들은 ‘솔로이스트’로의 기질을 갖고 있어 내가 돋보이길 바라나, 밴드의 원칙은 ‘우리’다. 이일우는 “멤버들이 음악적 욕심은 있는데 자기 고집이 없다”며 “우리의 음악을 위해 자기 스타일이나 고집은 내려놓고 양보한다는 것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일우가 만들어간 음악에서 한 치의 오차 없이, 놀라운 수준의 연주력으로 기량을 보여줬다. “어떤 곡을 써왔을 때 그게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을 텐데, 그것을 100을 넘어 200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고 이일우는 말했다.
17년차의 밴드에게 한국은 좁다. ‘경계의 파괴자’로 군림하자, 일찌감치 세계 유수 페스티벌이 러브콜을 보냈다. 영국 글래스톤베리, SXSW(미국), 로스킬데(덴마크), 프리마베라 사운드(스페인) 등이 앞다퉈 잠비나이를 찾았다. 지난해 10월엔 라디오헤드, 시규어로스와도 작업한 런던 컨템퍼러리 오케스트라와 바비칸 홀 협연 무대에선 전석 매진 사례를 기록, ‘록의 본고장’에서도 기립박수를 받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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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비나이 ‘적벽’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이일우는 “대중성이 없는 밴드인데, 또 이런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어 놀랐다. 세상엔 참 다양한 청자들이 많다”며 웃었다. 실제로 해외 페스티벌 공연 때 잠비나이가 사운드 체크를 위해 거문고 한 줄만 퉁겨도 외국인 관객들이 모여들며 신기해하는 광경이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영국 공연에선 이일우가 잠비나이의 모든 곡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의 악보 분석을 굉장히 많이 하면서 편곡 작업을 했는데, 그 위대한 작곡가들이 왜 대위법을 비롯한 법칙과 세밀한 계산으로 작곡했는지 알게 됐다”며 “선율, 화성에 있어 이전엔 사운드를 감각적으로 만드는 것에 의존했다면, 지금은 보다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소리를 설계하게 됐다”고 했다.
이 경험은 ‘적벽’으로도 이어졌다. 이일우는 “오케스트라 편곡이 자양분이 됐다”며 “이전과는 달리 코드 선율은 물론 화성적으로도 조금 더 구조적인 작업을 했다. 그런데 들을 땐 특히 다른 점은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이전과의 차이라면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정돈된 음악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상에 무수히 많은 ‘적벽’이 있었지만, 가장 전위적이며 급진적인 ‘적벽’이 완성됐다. 판소리라는 박물관을 뚫고 나온 음악은 가장 생생한 현대적 절규로 되살아났다. 잠비나이의 ‘적벽’은 소리가 어떻게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무대는 올해 중으로 앨범 작업에 돌입한다. 목표는 더 멀리 있다. 이일우는 “삼국지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관심이 많은 한·중·일 투어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한한령으로 중국 공연이 쉽지 않지만, 잠비나이는 이미 중국 측에서도 몇 차례 섭외를 받았고, 홍대 공연에선 중국 관객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어 희망은 있다. 오는 7월엔 체코 ‘컬러스 오브 오스트라바’ 페스티벌 무대에도 설 계획이다.
자유분방한 탈경계의 음악과 실험성은 잠비나이를 잠비나이로 존재하게 하는 가장 큰 무기다. 이일우는 “멤버들 모두 정형화된 틀에 갇히는 것을 경계한다”며 “퓨전 국악이나 이지 리스닝 계열의 음악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이번에 ‘적벽’을 작업하면서도 이 친구들은 정말 돈 벌 생각도 없고, 타협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잠비나이는 이렇게 계속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