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AI시대, ‘어쩔 수가 없다’는 없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감독 박찬욱)는 ‘다 이뤘다’고 자부하던 25년 차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 분)가 인공지능(AI)과 자동화 확산으로 하루아침에 해고되면서 시작된다. 재취업에 사활을 건 만수는 ‘단 한 명’만 선발하는 관리직 채용에 합격하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영화는 마침내 취업에 성공한 만수가 로봇들만 분주히 움직이는 작업장에서 홀로 일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AI혁명이 불러올 일자리 위기와 그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신종 사회범죄를 섬뜩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현실의 예고편이다. 지난 14일 구글 최고경영자(CEO)인 순다르 피차이는 모교 스탠퍼드대 졸업식에 축사를 하러 갔다가 예상밖 수모를 당했다. 그가 축사에 나서자 수십 명의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줄줄이 퇴장했다. 지난 5월엔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가 애리조나대 졸업식에서 AI의 발전을 강조했다가 학생들의 야유를 받았다. AI가 일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와 빅테크에 대한 불신이 맞물린 결과다.

‘만수의 비극’이나 미국 대학생의 반(反)AI 움직임은 남의 일이 아니다. AI에 일자리를 뺏길 수 있다는 불안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관건은 그날이 얼마나 빨리 오느냐다. 산업연구원은 한국 일자리의 약 13%(327만개)가 AI로 대체될 위험에 놓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상당수는 전문직과 사무직이다. 보고서 작성이나 장부정리, 세금계산, 비용처리 등의 반복적인 업무는 AI가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역시 전체 근로자의 27%가 AI로 인해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 감소 위험에 놓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AI, 특히 인간의 거의 모든 능력을 대체할 수 있는 AGI(범용 AI)가 본격화하면 사회 효율성과 생산성은 폭발적으로 높아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실업과 불평등을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AI는 강력한 정치적 반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정치권은 반AI 유권자를 겨냥한 포퓰리즘 정책도 쏟아낼 수 있다. “인간의 일자리를 먼저 지키라”는 표심을 파고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AI기업 과세, 데이터센터 건설 제한, 특정 산업의 AI 사용금지, AI 이익환수 등이 거론될 수 있다. AI 성장 속도에 넋 놓고 있다가는 대량 해고가 기폭제가 돼 AI를 향한 사회적 저항은 예상보다 훨씬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정부는 AI를 규제하는 체계적인 틀을 정비하는 한편, 재교육과 직무 전환, 청년 대책, 스타트업 지원 등 충격을 흡수할 안전판을 서둘러야 한다.

기업도 신입 채용을 줄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코너 그레넌 AI 마인드셋 CEO는 기업이 직원 채용을 줄이면 “10년 뒤에는 AI를 감독하고 평가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진 인재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글로벌 기업들이 최고AI책임자(CAIO)를 잇달아 영입하는 것도 AI를 조직 내 전반에 확산시켜 사람의 대체재가 아닌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기술 진보는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충격을 줄이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회의 몫이다. 정부는 일자리 전환과 재교육을 서둘러야 하고, 기업은 사람을 AI의 경쟁자가 아닌 협력자로 키워야 한다. 영화 제목처럼 ‘어쩔 수가 없다’고 체념하는 순간, AI는 혁신이 아니라 재앙이 된다.

천예선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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