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권력욕에 갇힌 조선 최고 걸크러시, 문정왕후 [서병기의 문화와 역사]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한 조선시대 6명의 대왕대비 중 가장 긴 9년간 대리 통치를 했다. 공과 대의가 아닌 사적인 이해관계로 철저히 계획된 정치권력을 행사해 후대의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은 문정왕후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아 피곤한 모습의 명종을 극화한 이미지. [KBS 제공]

 

KBS 1TV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가 최근 조선 악녀 잔혹사라는 특집으로 2부작을 방송했다. 첫 번째는 ‘장희빈, 누가 그를 악녀로 만들었나’ 편이고, 두 번째는 ‘女主(여주)의 탄생, 문정왕후’ 편이다.

장희빈은 그동안 사극에서 많이 다뤄져 대중에게는 ‘미인’ ‘악녀’ ‘요부’ 이미지가 강하다. 드라마에서 워낙 표독하게 다뤄진 면이 있어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희생양’으로서의 모습은 약하다.

문정왕후는 SBS ‘여인천하’(2001~2002)에서 전인화가 맡은 적이 있지만, 첫 번째 여주인공은 강수연이 맡은 정난정이었다.

그렇다 보니 문정왕후는 권력욕이 강한 ‘악후’(惡后)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알고보면, 문정왕후는 조선 최고의 걸크러시다. 그런데 권력을 가지려는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 공과 대의를 위해 쓰는 게 아니라 사적인 이해관계로 정치 권력을 행사해 비판을 받고 있다.

문정왕후의 선 넘는 권력 사유화

조선시대 여성이 권력을 행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왕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노골적으로 정치 권력을 행사했다.

조선시대에는 정희왕후, 문정왕후, 인순왕후, 정순왕후, 순원왕후(두차례), 풍양조씨 신정왕후 등 총 여섯 명의 대왕대비가 성종, 명종, 선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 일곱 차례에 걸쳐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세조가 승하하기 하루 전에 만 19살의 나이로 즉위한 예종은 어머니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지만, 바로 성인이 되는 바람에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은 성종 치세의 정희왕후로 기록됐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은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하면, 왕실의 최고어른인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왕이 20세 성년이 될 때까지 국정운영을 돕는 제도다.

문정왕후도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하면서 아들 명종이 1454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조선 13대 왕으로 즉위하자 9년간의 수렴청정에 나섰다. 6명 대왕대비중 가장 긴 대리통치 기간이다.

하지만 단순한 대리통치가 아니라, 철저하게 계획된 권력을 행사해나갔다. 문정왕후는 5일만에 한번씩 열리는 경연에도 참가하고, 직접 신하도 면대하고, 전교(傳敎)도 직접 내렸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제 2계비였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한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의 정비 단경왕후 신씨는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이어서 역적이 되었기 때문에, 반정후 7일만에 궁에서 쫒겨난다. 2017년 KBS 사극 ‘7일의 왕비’에서 배우 박민영이 맡았던 역할이다.

이렇게 해서 공석이 된 국모 자리를 숙의 윤씨가 간택되면서 장경왕후 윤씨가 중종의 제 1계비가 됐다. 하지만 장경왕후가 25세 나이에 산후병으로 죽자, 의붓아들인 어린 왕 인종을 잘 보호해줄 수 있는 파평윤씨 문중에서 문정왕후 윤씨가 왕비로 간택된 것이다.

문정왕후는 17세에 왕비로 간택되어, 13세 연상의 중종과 가례를 올렸다. 처음에는 이모-조카 사이처럼 인종을 잘 돌봐주는 것 같았지만, 자신 또한 세 명의 딸을 연속으로 낳은 후 아들(경원대군, 나중에 명종이 됨)을 낳자 인종을 시기, 질투하기 시작했고 강한 권력욕을 보여주었다.

중종은 승하한 후 경기도 고양시에 장경왕후와 가까운 곳에 묻혔지만, 문정왕후는 자신이 중종과 함께 묻히고 싶어 중종 능을 강남으로 옮겨왔다. 하지만 지관이 습기가 차는 곳이라고 해서 태릉(泰陵)에 혼자 묻혀있게 된 것. 그 곳에서 1㎞ 떨어진 거리에 아들 명종과 며느리 인순왕후의 능인 강릉(康陵)이 있다. 두 왕릉을 합쳐 태강릉으로 불린다.

왕릉은 이름만 봐도 남녀 구분이 가능하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태릉은 오히려 남성적이다. 중종은 강남 선릉로의 선정릉(宣靖陵) 안에 있다. 아버지인 성종은 계비 정현왕후와 함께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함께 있지만 중종 자신은 홀로 있다. 어떤 아내와도 함께 하지 못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문자 그대로의 수렴청정이 아니었다

문정왕후는 단순한 대리통치가 아닌, 철저히 계획된 권력을 행사했다. 인종 승하와 명종 즉위는 1545년에 이뤄졌는데, 문정왕후는 자신의 동생 윤원형(소윤)을 활용해 인종의 외척인 윤임 일당(대윤)을 척결하며 조정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을사사화를 주도했다. 명종 2년(1547년)에는 양재역 벽서사건을 통해 자신의 권력에 도전한 반대파들을 척결했다. 숙정작업의 실행자는 자신의 동생인 윤원형이었다. 윤원형은 영의정의 자리까지 오른다. 문정왕후는 조정의 실권을 완전히 거머쥐었다.

문정왕후는 을사사화때 윤임 일당만 제거한 게 아니라 성리학적 도덕정치를 내세운 사림들도 ‘대윤의 잔당’이라는 낙인을 찍어 대거 제거했다. 문정왕후는 훈구파건, 사림파건 정국 운영은 왕실이 주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둔 후에도 왕에게 지시를 내려보냈다. 명종은 쪽지에 쓰여진 대로 실행하지 않다가는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연려실기술에는 어떤 때에는 아들인 명종을 때리기까지 하여 임금의 얼굴에 기운이 없어졌다고 쓰여있다. 명종이 심열증(心熱症)을 앓은 것도 엄마의 호통이 큰 원인이 됐을 터. 명종 입장에서는 “아, 내 위에 임금 한 분이 또 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정에 대한 문정왕후의 선을 넘는 간섭은 1565년, 65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진다.

문정왕후의 사망으로 명종이 친정을 할 것처럼 보였지만, 2년도 되지 않아 승하하는 바람에 독자적인 정책을 남기기는 어려웠다. 어머니의 호된 질책으로 주눅이 든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 한 명만 뒀는데, 그나마 12살에 죽어 조선 7대 국왕 세조 이후 이어져온 적통 왕계가 끊겼다. 이에 따라 중종의 서자이자 명종의 이복서형인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이 방계혈통으로 선조가 되어 왕위를 계승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사초(史草)를 근거로 작성된다. 선대의 실록이 작성되면 사초는 세검정의 흐르는 물에 씻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이를 세초례(洗草禮)라고 한다. 세검정에 가보면 ‘세초(洗草)의 유적’이라는 표식이 있다.

그런데 윤원형은 사초를 열람했다. 반역이 될 수 있는 행위다. 물론 문정왕후가 이를 허락했다. ‘소윤’ 윤원형은 을사사화 부분을 열람하고 역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점 등을 문제삼아 사관 안명세를 참수하고 그의 처와 자식을 종으로 만들었다. 모두 문정왕후의 공포정치다.

유교국가 조선, 문정왕후의 노골적인 불교진흥책

조정의 권력을 완전히 잡은 문정왕후의 또 다른 정책은 불교진흥책이었다. 조선은 유교국가다. 억불숭유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교가 하루 아침에 없어질 수는 없다. 세종은 내불당을 설치하고 불경을 간행했다. 세조는 간경도감을 두고 불경을 간행했으며, 원각사를 짓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눈치를 보며 불교를 지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아예 대놓고 불교회생책을 강구한 불교숭상자였다. 도첩제를 실시해 국가 공인 승려를 뽑고 300여개 절을 공인하였으며, 30년 넘게 시행되지 않았던 승려과거시험(승과)을 부활시켰다. 마치 승려사관학교 같은 느낌이 난다.

이를 위해 1551년 ‘허응당’ 보우를 봉은사 주지 스님으로 임명하고 실권을 주었다. 선종의 본산이 된 봉은사는 승과시험장이었다. 이런 불교진흥에 반발해 성균관 유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기도 했다. 경의(敬義) 사상을 주창하며 실천을 강조해온 유학자 남명 조식은 문정왕후에게 날선 비판의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봉은사는 선정릉의 능침사(陵寢寺)이기도 하다. 능침사는 왕릉 근처에 지은, 승하한 왕과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정기적으로 재나 예불을 올리는 사찰을 말한다. 과거에는 봉은사가 지금보다 선정릉 방향으로 더 가깝게 있었다.

봉은사 외에도 세조가 묻혀있는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의 봉선사, 세종대왕과 효종이 있는 여주 영녕릉의 신륵사,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 정조가 묻혀있는 화성 융건릉의 용주사가 능침사찰이다.

능침사는 제사를 위해 음식을 장만해야 하므로 음식을 잘 만든다. 조포사(造泡寺)라고 하여 왕릉에 지내는 제사에 쓸 두부를 만든다. 문정왕후에 의해 교종의 수사찰로 지정되어 승과가 치러진 봉선사의 제사에 쓸 두부 맛은 일품이었다고 한다.

문정왕후 시기의 불교 부흥책으로 똑똑한 승려들이 대거 발탁됐다. 이때 승과에 합격한 유정과 휴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크게 활약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 조식의 제자들인 곽재우가 의령에서 기병했고, 정인홍은 합천에서 기병했지만, 유정(사명대사)은 금강산에서, 휴정(서산대사)은 묘향산에서 각각 기병했다.

특히 유정은 국가의 위기에 의승(義僧)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에서도 큰 활약을 보여주며 민족의식을 강화하는데 앞장섰다. 유정은 조선 최고의 외교관 반열에도 올랐다.

문정왕후의 불교진흥책은 유정·휴정 등 명승을 배출했지만…

유정(惟政)은 당호인 사명당, 사명대사로 불리며 속명은 임응규다. 특이하게도 수염을 기른 스님이다. 1544년 경상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밀양의 홍제사에는 사명대사를 기리는 ‘땀 흘리는 비석’ 표충비가 있다. 유정은 밀양의 표충사와 묘향산의 수충사에 배향돼 있다.

유정은 1561년(명종 16)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 선종(禪宗)의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청허대사(서산대사)로부터 불교를 더 깊게 공부했다.

지난 5월 24일 방송된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사명대사, 중생을 위해 칼을 들다’를 주제로 조선 승려 사명대사 유정의 삶을 되짚었다.

유정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금강산 자락의 건봉사에서 사병인 의승군(義僧軍)을 모아 전공을 많이 세웠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에서 왜병을 대파했고, 네차례의 전투 끝에 평양성 탈환에 성공했다. 행주대첩에도 참가했다. 유정은 영남지방에서도 왜군과 싸웠으며 성을 쌓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병참’에도 신경을 썼다. 선조는 유정에게 정 3품 벼슬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조선의 승군제도는 이후에도 호국사상과 실천수행을 중시하는 불교로 발전하게 됐다. 경주에 있는 ‘선무도의 총본산’ 골굴사는 승군 후예들이 이런 불교정신을 계승, 발전시켜나간 곳이다.

유정은 울산에서 서생포왜성을 1년만에 쌓고 그안에 있던 일장 가토 기요마사와도 회담했다. 유정 입장에서는 기리스탄(일본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카 보다 불교신자인 가토 기요마사가 조금 더 편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으로는 보인다.

하지만 일본은 강화회담 조건으로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을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인질로 보낼 것,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할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규정을 내걸었다.

조선은 이 조건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명당은 가토가 “조선의 진짜 보배가 무언지 아시오?”라고 묻자 “그대의 머리”라고 답했다. 사명당은 두려움이 다가올 때도 할 말은 다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강화회담은 결렬되고,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조선인의 코와 귀를 잘라 전리품으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지금도 교토의 도요큐니 신사 주변에는 이총(귀무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가 헐값에 노예로 팔아넘겼다. 유정은 이렇게 고통받는 조선 피로인(被虜人)을 구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604년, 사명대사는 개인자격으로 일본으로 향했다. 61세의 고령으로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행위였다. 전쟁하다 잡혀간 자국민을 데리고 온다는 건 국가의 기본의무였다. 미국은 타국에서 전쟁을 수행하다 숨진 병사들의 유골을 끝까지 수습해 본국의 국립묘지에 안장한다. 그것 하나는 멋있다. 유정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개인이 한 것이다.

유정은 교토의 본법사에 머물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일본은 기다리다 지치게 만드는 전략을 썼다. 무려 3개월이 흘렀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긴 협상 끝에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3000여명의 조선 피로인과 함께 귀국했다고 한다. 그 상황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유정의 일본체류 당시 많은 승려들이 찾아와 친필을 받아갔다. 교토 흥선사는 2024년 사명대사의 친필 유묵 5점을 공개하기도 했다.

유정(사명대사)과 휴정(서산대사)은 문정왕후의 불교진흥책을 통해 발탁된 ‘참된 인사’다. 오늘날로 치면 고시(승과고시)에 붙어 실력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지행합일’의 경지에 이른 리더다. 엄청난 수행력이 바탕이 돼있지 않고서는 그렇게 되기 힘들다. 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국왕 등 지배층과 양반들이 뭘 했는지는 우리는 알고있다.

유정과 휴정은 ‘문정왕후 현상’이기는 하지만, 문정왕후는 개인의 욕망과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국가의 시스템을 사적으로 사용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다. 결코 좋게 해석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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