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플렉스가 당연한 극장가 풍경이 된 지금, 소자본의 작은 영화들이 영화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제 이상한 일도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저예산 영화인 <귀향>과 <동주>가 나란히 극장가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 두 영화에 20대 여성 관객들의 비율이 이례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CGV에 따르면 <귀향>의 27.3%, <동주>의 31.3%가 20대 여성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20대 여성의 감성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영화들. 어째서 이 두 영화에 대해 20대 여성들이 응답한 걸까.
게다가 영화는 결코 상업적이지 않고, 상업적으로 만들어져서도 안 되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실제로 ‘위안부’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귀향>은 제작기간만 무려 14년이 걸렸다. 그것도 무산 위기에서 뜻을 모은 시민 7만5천여 명의 모금을 통해 겨우 제작될 수 있었다. 만일 상업적인 영화였다면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영화 제작사들이 얼마나 대단한가. 돈 되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찾아내 상업적으로 만들어내는 데는 이력이 난 그들이다.
<동주> 역시 마찬가지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고작 5억 원의 저예산으로 만들어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규모는 상업적인 것과 비례한다. 몇 백 억을 들인 블록버스터들은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그만큼의 돈이 투자되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천만 관객’을 넘겨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난다. 많은 돈을 들인 영화가 실패확률이 적은 건 투자자들이 배급에도 그대로 관여하고 있는 우리네 현실 때문이다. 성공하려면 더 크게 벌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건 결코 농담이 아니다.
<귀향>은 일부러 자극적인 장면들을 에둘러 표현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그것은 아마도 희생자들을 위한 영화의 배려일 것이다. 그러니 영화의 내러티브는 훨씬 약해졌다. 물론 그 약하다는 것도 워낙 실제 역사적 사실이 참담한지라 결코 약하게 볼 수는 없다. 그래도 절제하려는 면이 이 영화에서는 두드러진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현재의 젊은 여성이 ‘무당의 신기’를 통해서나마 교감하고 소통하는 이 영화의 구성은 그래서 자극을 꺼내기보다는 현재에 이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고, 왜 우리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실상을 기억해내야 하는가를 보다 명료하게 해준다.
<동주>가 흑백영화로 촬영된 것 역시 고 윤동주 시인과 독립운동가 송몽규에 대한 영화의 예우처럼 보인다. 그 핏빛 청춘이 일제에 의해 원색으로 더럽혀지는 장면보다는 흑백 속에 아련하게 역사가 되는 걸 이 영화는 바랐을 것이다. 투쟁가라기보다는 그저 ‘부끄러움을 아는’ 평범한 청춘이었던 윤동주가 시대 앞에 스러지는 모습은 아마도 지금의 청춘들의 가슴에 저릿하게 다가왔을 게다.
왜 청춘들이 <귀향>과 <동주>에 화답했는가 하는 질문은 거꾸로 왜 하필 지금 ‘위안부’ 문제를 다룬 <귀향>과 고 윤동주 시인을 다룬 <동주>여야 했는가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의해 무참하게 꺾인 소녀들과 청춘들이 있다. 부끄러운 세상 앞에 결코 그들이 부끄럽지 않다고 전하는 이 영화들은 그래서 청춘들을 희생자로 내모는 지금의 부끄러운 현실과 조우하는 면이 있다. 청춘들은 그렇게 이 두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그들처럼 작지만 결코 가치가 없다고 폄하될 수 없는 이 두 영화를 통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