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유 “성취, 특권도 ‘젊은 한국 여성’이라는 정체성 바꾸지 못해” [인터뷰]

도이치그라모폰 4번째 앨범 ‘사랑의 향연’
다양한 음악과 장르로 정교하게 큐레이션
“‘경계 없는 언어’인 음악…한계 넓히고파”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 [유니버설뮤직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서로 다른 사랑의 형태가, 찬란한 무지갯빛으로 내려앉았다. 말러의 ‘아다지에토’를 빌려 새로운 러브레터를 썼고, 번스타인의 ‘세레나데’를 통해 “기꺼이 나를 드러내는 용기”를 찾았다. ‘위대한 쇼맨’의 ‘네버 이너프’ 안엔 나를 향한 사랑과 연대를 새겼다.

“사랑의 모든 형태와 강도, 그 넓은 범위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소리의 세계’를 구현하고 싶었어요. (누구나 가지고 있을) 자신을 있게 한 ‘사랑’에 기꺼이 마음을 열어보는 거죠.”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32)의 앨범이 보여주는 새로운 방식의 큐레이션은 클래식 음반의 새 지평처럼 보인다. ‘사랑’이라는 큰 주제로, 각기 다른 시대와 다른 장르의 음악을 관현악과 실내악으로 채웠다. 청중의 취향을 정밀하게 타격하되, 클래식의 학구적 접근과 확장을 도모했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을 통해 선보이는 네 번째 음반 ‘사랑의 향연(Love Symposium)’이다.

그는 헤럴드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 안에서 자신만의 이야기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학구적 탐구를 이어왔던 에스더 유에게 이번 음반은 극히 ‘개인적인 앨범’이다. 그는 “음악 속 사랑은 보통 낭만적 이상으로 여기지만, 때론 복잡하고 엉망진창이기도 한 ‘진짜 사랑’의 세계를 소리로 구현하고 싶었다”며 “나의 음악 여정과 삶에서 이정표 역할을 했던 곡을 골라 음반에 담았다”고 했다.

앨범엔 2018년 상주 음악가로 활동하며 깊은 인연을 맺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번스타인의 ‘플라톤의 향연에 의한 세레나데’, 말러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 영화 ‘위대한 쇼맨’ 중 ‘네버 이너프(Never Enough)’, 본 윌리엄스의 ‘종달새의 비상’ 등을 담았다. 지휘는 롱 유(Long Yu)가 맡았다.

사랑은 ‘보편적 언어’이나, 그것은 언제나 개인의 서사 위에서 완성된다. 미국에서 태어나 벨기에와 독일에서 공부했고, 그러면서도 ‘한국의 뿌리’를 깊숙이 안고 있는 ‘삼중 문화’는 에스더 유의 정체성과 사랑을 통한 소통방식을 만들었다. 국내 한 중견기업이 그의 외가다.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 [유니버설뮤직 제공]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시선이 때론 음악적 고민을 가리기도 했지만, 인종차별이나 정체성 혼란은 부모님의 지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유럽 유학 시절과 연주 활동 당시, 인종차별도 숱하게 겪었다. 배경의 후광보단 이방인의 그림자가 더 짙었던 날들이 길었다.

“어떤 성취나 타이틀, 특권도 ‘젊은 한국 여성’이라는 제 정체성의 근본적인 현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서구권에서 성장하며 전 수없이 많은 차별과 직면했어요. 때로는 출신 배경 때문에, 때로는 성별이나 나이 때문에, 그리고 종종 이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말이죠.”

코로나 팬데믹 기간엔 아시아 커뮤니티에 대한 극단적 차별을 마주했다. 혼자 길을 걷던 중 욕설을 들었고, 누군가는 그에게 침을 뱉었다.

에스더 유는 “내 면전에서 문을 쾅 닫으며 ‘당신 같은 사람’은 환영받지 못한다는 신호를 받은 적도 있다”며 “하지만 이런 경험들은 제게 아주 두터운 맷집(thick skin)과 회복탄력성, 깊은 책임감을 길러줬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유럽의 클래식 음악계에서 에스더 유는 지난해 가을 학기부터 한국인 최초로 영국왕립음악대학(RCM)의 교수가 됐다. 이 학교의 역대 최연소 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이것이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나의 길은 단순히 나만의 커리어가 아닌 변화의 일부가 돼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며 “하나의 경계가 허물어질 때마다, 다음 세대를 위한 더 넓은 공간과 가능성이 열린다”고 강조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 [유니버설뮤직 제공]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그의 행보 중 단연 눈에 띄는 부분은 최근 공인 ‘정신건강 응급처치사(MHFA, Mental Health First Aider)’ 자격을 취득했다는 점이다. 의료 응급처치 요원과 비슷하나, 신체가 아닌 정신건강을 개선하는 역할을 위한 자격증이다. 완벽주의를 강요받는 클래식 음악인들에게 손을 건네는 상담사를 자처한 것이다.

“정신건강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벅찬 감정과 강력한 압박감에 시달릴 수 있는 음악계에서 종종 간과되곤 해요. 대화를 장려하고 음악계 내에서 정신건강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한 그는 12살에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청소년 부문에서 우승한 이후, 시벨리우스 콩쿠르 3위(2010),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4위(2012)에 올랐다. 2018년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 아티스트로 활동했다. 정통 클래식 교육 코스를 밟았지만, 그의 음악은 클래식의 세계 안에서도 무한히 확장된다. 정통 클래식은 물론 영화음악을 넘나들며 장르의 벽을 깨부순다. 삶에서도 음악에서도 두려움 없는 모험가였고, 높은 파고도 유연히 마주하는 개척가였다. 그는 지금도 10년 뒤에도 “진화하고 성장하는 사람”이기를 꿈꾼다.

“사랑에 정답이 없듯이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경계의 벽을 낮춰서 음악이 지닌 본연의 메시지를 자유롭게 전달하고 싶어요. 그게 제가 믿는 ‘경계 없는 언어’로서의 음악이니까요. 계속해서 한계를 넓혀가며,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에서 진실함을 찾으려 노력했던 사람,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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