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엄벌주의가 교실을 비정한 ‘생존 게임’으로 밀어 넣었다. 사소한 다툼도 무조건 학폭위로 던져지면서 심의는 폭증했지만 정작 ‘학교폭력 아님’ 처분만 쏟아지며 교실의 자정 기능은 마비됐다. 입시 감점을 피하려는 어른들의 소송 대리전 속에서 아이들은 사과와 화해 대신 약점을 수집했다. 피해자 보호라는 본질을 잃고 사법화의 늪에 빠진 학폭 제도의 구조적 모순을 학부모·변호사·교사·학생 4개의 엇갈린 시각으로 입체적으로 해부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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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학생이 단체카톡방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모습. [챗GPT를 통해 제작] |
[헤럴드경제=김용재 기자] “싸우면 일단 둘 다 신고부터 해요. 섣불리 사과했다간 가해자로 몰립니다. 당하기만 하면 무조건 손해라는 분위기가 교실에 팽배해요.”
현재 재수생 신분인 A군(20)은 학교폭력 제도를 묻는 말에 씁쓸하게 답했다. 단톡방에서 서로 욕하며 놀리던 사소한 장난이었지만 상대방 부모의 신고로 학폭위가 열렸고 생활기록부에 서면사과 조치가 남았다.
A군은 “저도 당한 게 있었지만 결국 기록은 제 생기부에만 남았다”며 “고3 내내 이 기록 때문에 입시에서 떨어질지 그것만 검색하며 지옥을 맛봤다”고 토로했다.
학교폭력 제도가 학생들에게 남긴 가장 큰 변화는 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아니라 ‘방어 본능’이었다. 갈등이 생기면 사과보다 신고를, 화해보다 증거 확보를 먼저 고민하는 문화가 교실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우정의 붕괴는 일상화된 디지털 증거 수집에서 시작된다. 2025년 전국 고교 학교폭력 심의 건수 가운데 언어폭력(32.5%)과 사이버폭력(13.4%)은 전체의 절반 가까운 비중을 차지했다.
친구 관계 갈등으로 학폭위에 섰던 중학교 2학년 B양은 “친구들이랑 싸우면 다들 캡처부터 한다”며 “카카오톡 대화나 인스타그램 DM은 언제든 학폭 증거가 될 수 있어서 함부로 지우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처음에는 그냥 화해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부모님들끼리 싸우면서 일이 커졌다”며 “그때부터 친구가 아니라 상대방이 된 느낌이었다”고 했다.
학생들이 갈등 해결법보다 기록을 남기는 법을 먼저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들은 결국 서로를 향한 ‘맞신고’ 무기로 남았고 어느 날에는 장난이었던 말들이 다른 날에는 학교 폭력으로 둔갑하는 일이 많아졌다.
학폭위 경험은 학생들에게 또 다른 학습 효과를 남긴다. 학폭위를 경험했던 경기도 고등학교 2학년 C양은 “위원들이 제 카카오톡 대화를 소리 내 읽는데 너무 수치스러웠다”며 “내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말해야 나한테 덜 불리할지 계산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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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대 학교폭력 대입조치 사항 |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학생들은 어른들의 입시 논리를 그대로 체화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특목고에 재학 중인 D군은 “애들끼리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생기부에 학폭 기록이 남으면 의대에 못 간다고 하면서 변호사를 알아봤다”고 말했다.
이어 “솔직히 친구한테 미안한 마음보다 조치가 몇 호가 나올지가 더 중요해졌다”며 “주변에서는 성적 올리고 싶으면 장난삼아 나보다 상위권 학생을 학폭으로 신고하면 된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실제로 학생과 학부모들이 처분 호수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명확하다. 주요 대학들이 학폭 처분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2027학년도 대입 전형계획에 따르면,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이른바 ‘SKY’ 대학들은 가장 가벼운 1호 처분(서면사과)만 받아도 수시와 정시 모두에서 감점을 준다.
소수점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 최상위권 입시에서 사소한 장난으로 받은 서면사과 기록 하나가 사실상 ‘불합격 선고’가 되는 셈이다.
2026년 교실의 학생들은 더 이상 갈등이 생겼을 때 사과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는다. 대신 카카오톡 대화를 캡처하는 법을 배우고, 증거를 남기는 법을 배우며, 먼저 신고당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먼저 사과하면 손해 본다”는 인식이 퍼진 교실에서 친구는 어느새 관계를 회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대비해야 할 위험이 됐다. 어른들이 만든 학폭 생존 게임 속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아이들의 화해하는 방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