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서울 강남구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영화 ‘암살’(감독 최동훈ㆍ제작 ㈜케이퍼필름)이 베일을 벗었다. ‘이야기꾼’ 최동훈의 비범함은 찾기 어려웠지만, 매끈한 액션과 뭉클한 메시지가 어우러진 시대극은 상당한 흡인력이 있었다.
‘어벤져스’급 배우들은 흠 잡을 데 없는 명연을 펼친다. 명사수로 분해 1인2역까지 소화한 전지현은 물론, ‘이 남자는 못 하는 게 뭔가’ 싶을 만큼 멋들어진 총격 액션을 벌이는 하정우, 웃기다가 울리는 주특기를 뽐낸 조진웅, 어떤 작품의 어느 자리에 앉혀놔도 위화감 없는 오달수까지…. ‘캐릭터가 배우 덕을 봤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특히 이정재는 ‘수양대군’에 이어 또 다시 그의 필모그래피를 빛낼 캐릭터를 만났다. 친일파 암살 작전을 지휘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염석진’ 역이다. 사실 ‘관상’에서 수양대군 등장 신은 얼굴의 흉터와 눈빛, 걸음걸이 등 이정재의 외양이 뿜어내는 힘이 컸다. 반면 ‘암살’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염석진의 연기는 배우 이정재가 고뇌하고 분투한 흔적이 묻어난다.

“시나리오 처음 읽었을 때 역할이 좋다기보다 어렵겠구나 생각해죠. 외부의 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내부의 적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더 안 좋은 악당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번 캐릭터를 맡아서 연습할 때, 여러가지 버전을 동시에 준비했어요. 이렇게 연기하면, 혹은 저렇게 연기하면 어떤 효과가 날까 하고. 어떤 측면에선 재미있기도 했지만 마음의 부담감이 크긴 했죠.”(‘암살’ 기자 간담회 중)
이정재라는 배우가 가장 빛나는 장면을 꼽는다면 단연 후반부 법정 신이다. 해방 후 염석진은 법정에서 방청석을 향해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그 표정과 눈빛에서 양심의 가책이나 불안감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확신에 찬 눈빛이다.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변호인’의 형사, ‘소수의견’의 검사처럼) 진정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기에 더 섬뜩하다.
게다가 염석진이 과거 독립운동의 상흔이 남은 노쇠한 몸뚱이를 드러낼 때는 ‘어떻게 저런 몸을 만든걸까’ 싶어 입이 떡 벌어진다. 이정재는 지금까지 배역을 위해 몸집을 키우거나 줄여야 할 때, 대개는 운동으로 체중 조절을 해왔다. 그런데 이번엔 60대의 몸에 맞게 근육도 빼야하니 운동으로는 감량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식이요법 등에 의지해 15㎏을 혹독하게 뺐다고. 물론 특수분장의 도움도 받았지만, 어깨나 팔 부위는 촬영 중 계속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분장으로 눈속임을 할 수 없었다.
최동훈 감독은 이정재에 대해 “보면 볼 수록 뭐가 있는데 잘 안 보여준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며 “저 사람을 좀 괴롭히고 싶다, 쓸쓸하지만 자기 자신에 확신이 있는 그런 악당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바람대로 최동훈 감독은 그에게서 ‘쓸쓸하지만 확신에 찬 악당’을 성공적으로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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