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과 연합의병대 이끌어 전공
차 선생 자손은 중국서 핍박 받으며 지내
“복있어 한국 살 수 있다…할아버지 덕”
![]() |
| 독립운동가 차도선 선생의 건국공로훈장. 이영기 기자. |
[헤럴드경제=이영기 기자] 95년. 한 독립유공자 후손이 할아버지의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걸린 시간. 100년 가까이 후손들은 타지에서 받는 모진 차별과 핍박을 견뎠다. 잦은 이사로 공부도,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홍범도 장군과 함경남도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의병대장 차도선 선생. 그 손녀 차옥겸(77) 여사 이야기다. 차도선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후원한 인물이기도 하다.
![]() |
| 독립운동가 차도선 선생의 손녀 차옥겸 선생이 14일 오후 서울 양천구의 자택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1939년 영면한 차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95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전까지는 중국에 안장돼 있었다.
헤럴드경제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그간 조명되지 않았던 독립유공자를 찾아 나섰다. 어렵게 그 후손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차 여사는 어릴 적 들었던 이야기와 각종 메모, 기록물들을 꺼내며 100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긴 이야기는 1907년부터 시작된다.
1907년 당시 차 선생은 대한제국 진위대 하사로 복무했다. 그해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당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차 선생은 군인 특기를 살려 산에서 호랑이를 잡는 ‘산포수’로 일했는데 또 일본군이 문제였다. 일본군은 산포수가 쓰는 화승총마저 수거했다. 차 선생이 의병 봉기한 ‘트리거’였다.
지역 산포수들을 70여명을 모아 봉기한 차 선생은 함경남도 일대에서 주민들에게 단발을 강요하고 각종 세금을 거둬 사적으로 사용한 안산면의 면장 주도익을 처단했다. 이를 계기로 차 선생과 함께하겠다는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각지의 산포수들이 모여 의병부대는 600여명 규모로 커졌다.
같은 시기 의병을 일으킨 홍범도 장군의 의병부대와 차 선생의 의병부대가 연합했다. 산포수들이 모여 만들었던 작은 의병부대는 짧은 시간에 1000여명의 연합의병부대로 커졌다. 차 선생은 대규모 부대를 이끌며 일본군에 항전했다.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 |
| 독립운동가 차도선 선생의 국가유공자 증서. 이영기 기자. |
이듬해인 1908년 의병운동을 이끌던 차 선생은 일제의 술수에 넘어가 갑산헌병분견소에 구속됐다. 차 여사는 할아버지의 탈출 일화를 얘기하다가 알려지지 않은 탈출 과정에 대한 애기를 꺼냈다.
차 선생은 남들에 비해 눈치가 매우 빨랐다. 구속된 상태였지만 교도관들은 그에게 신문을 매일 넣어줬다. 어느 날부터 신문이 뚝 끊겼다.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것을 직감했다. 탈출 계획을 세웠다.
차 선생은 ‘입맛이 없다’는 핑계로 식사마다 고춧가루를 받았다. 먹지 않고 따로 모아놨다. 탈출을 시도할 때 교도관들 얼굴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달아났다. 차 선생이 분견소를 탈출할 당시 고춧가루는 지금의 고추스프레이처럼 쓰였다는 게 차 여사의 설명이다.
![]() |
| 독립운동가 차도선 선생의 손녀 차옥겸 선생이 14일 오후 서울 양천구의 자택 앞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차 선생이 탈출하자 일본군의 칼은 가족들에게 향했다. 차 여사의 할머니는 일본군에게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다. 차 여사의 할머니는 평생 복부 가득 흉터를 갖고 살았다. 일본군이 불에 달군 쇠로 지져가며 고문을 했던 흔적이다.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지속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차 선생은 1909년 초 중국으로 망명한다.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을 동원했다.
차 여사는 차 선생의 망명 과정에서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설명했다. 차 선생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 바다를 건널 방법이 필요했다. 끔찍하지만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함경남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관 밑에 공간을 만들어 숨는 방법이었다. 차 선생은 중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시체 밑에 숨어 이동했다.
일본군의 눈을 피해 망명에 성공한 차 선생은 중국 지린성에서 자리 잡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항일무쟁운동을 이어갔다.
차 선생이 영면(1939년)한 지 10년되던 해 차 여사가 태어난 곳도 지린성의 무송현이다. 조선에서 온 사람이 한명도 없는 중국인 마을이었다. 독립유공자 후손이 타지에서 겪은 설움과 핍박을 온몸으로 느낀 곳이기도 하다.
농사 지을 땅도 기댈 친인척도 없었다. 그저 일본군의 눈을 피해 숨고 또 숨어 들었다. 생계를 책임졌던 차 여사의 아버지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산에 들어가 살았다. 차 여사는 부모와 신체 장애를 가진 언니와 함께 간신히 생활을 꾸려갔다. 핍박과 설움은 이어졌다. 아직도 차 여사에게 생생하게 남은 상처도 설명했다.
![]() |
| 독립운동가 차도선 선생의 손녀 차옥겸 선생이 14일 오후 서울 양천구의 자택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제대로 된 거처도 없던 차 여사 가족에게 중국 지방 정부는 새집을 지을 주택 자재를 보급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멋대로 가져갔다. 자재들은 축사를 짓는 데 쓰였다. 그리곤 쓰러져가는 ‘헌 집’을 내줬다. 이방인 가족은 한마디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언니와 차 여사는 억울함에 며칠을 울었다.
이 같은 환경에서 차 여사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간신히 마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주로 농사일을 도우며 홀로 돈을 벌었다. 이미 연로한 부모와 장애가 있는 언니를 사실상 먹여 살렸다.
그 무렵인 1962년 한국에서는 차도선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지만 차 여사 가족은 전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자부심도 가질 수 없는 환경에서 세월이 흘렀다.
30년이 지난 1995년이 돼서야 대한민국 정부는 차 여사 가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 선생 유해 봉환을 추진하던 당시 국가보훈처는 차 여사가 태어나 자란 지린성 무송의 옛집에서 차 선생의 묘소 등을 확인했다.
![]() |
| 독립운동가 차도선 선생의 손녀 차옥겸 선생이 14일 오후 서울 양천구의 자택 앞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그해 차 선생이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된 후 차 여사 가족은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2004년 차 여사는 한국인으로서 할아버지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한 지 95년 만이다.
당시 차 여사의 나이 56살이다. 어렵게 시작한 한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다시 또 이방인이 된 듯했다. 한국에서 자리 잡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차 여사는 한국에서는 청소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여관, 아파트에서 일했다. 알코올 중독 병원에서도 청소를 했다. 그렇게 10년 넘게 청소 일을 했다.
차 여사의 고생 끝에 자식과 손자들도 할아버지의 고향 땅을 밟았다. 차도선 선생의 현손이자 차 여사의 셋째 손자는 지난 4일 군에 입대해 대를 이어 나라를 지키고 있다.
차 여사는 고국에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6.25 전쟁 등을 거치며 폐허가 됐던 한국이 회복하고 성장하는 시기에 힘을 보태지 못했다는 것이다.
차 여사는 “우리나라에 미안한 마음이 있다”며 “6.25 전쟁 때 엄청 잿더미가 되지 않았냐. 그때 와서 흙 한 삽이라도 보탰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대한민국이 어렵게 살 적에 보태지 못했는데 여러 지원을 받으니 대한민국에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 |
| 제 80주년 광복절 경축식 초대 카드. 이영기 기자. |
인터뷰를 마치며 차 여사는 ‘제 80주년 광복절 경축식 초대 카드’를 자랑스럽게 꺼내 보였다. 광복절 당일 열리는 경축식에 초대하는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의 초대 카드였다.
카드를 들고 차 여사는 “‘복이 있어서 한국에 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한다”며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는 그런 덕을 못 봤다. 할아버지가 노력했던 혜택을 우리가 받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