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A. 로빈슨 교수 강연
“가족기업 비효율적이란 통념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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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로빈슨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ESWC2025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은 제임스 로빈슨(왼쪽) 시카고대 교수와 네이선 넌(오른쪽)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교수. [정호원 기자] |
[헤럴드경제=정호원 기자] “한국 재벌은 서구 경제학 이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국만의 독자적 성공 방식이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로빈슨 시카고대 교수가 19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학자대회’에서 이같이 진단했다. 그는 “가족기업은 비효율적이라는 통념과 달리, 한국 재벌은 국가 운영 방식과 가족 중심 문화가 결합해 독자적 성장 경로를 만들었다”며 “국가 발전은 단순한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 만들어낸 균형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현재 여당이 노란봉투법과 상법 개정안 입법을 추진해 재계 경영이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이 쏟아지는 가운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한국 경쟁력 근간으로 오너 그룹의 역할을 강조해 주목된다. 특히 대내외 위기일수록 한국 성장을 지탱해 온 주요 그룹의 안정적 경영 환경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으로 풀이된다. 나아가 일방적인 기업 옥죄기 법안이 강행될 경우 한국 성장을 이끈 핵심 동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커 로빈슨 교수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로빈슨 교수는 시카고대 석좌교수이자 피어슨 글로벌 갈등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다론 아제모을루, 사이먼 존슨 MIT 교수와 함께 사회적 제도가 국가 번영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정치경제학, 경제사, 개발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특히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는 51개 언어로 번역돼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 ‘좁은 회랑(The Narrow Corridor)’ 역시 26개 언어로 번역되며 주목받았다.
로빈슨 교수는 제도와 문화의 결합으로 독자적 성공 경로를 개척한 대표적 사례로 한국을 꼽았다. 그는 “1950년대 농지개혁으로 사회적 이동성이 확대됐고, 민주화 이후 경제 성장이 가속화되면서 포용적 제도의 힘이 발휘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 연구에서 포용적 제도를 갖춘 국가는 성장과 번영을 달성하는 반면, 소수 집단에 부와 권력이 집중된 착취적 제도는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제시했다. 박정희 시기의 국가주도 개발에 대해서는 “우연히 개발에 집착한 지도자를 만난 결과일 수 있다”며 단순히 제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맥락을 짚었다.
특히 그는 한국의 ‘재벌’을 언급하며 “한국 사회의 문화, 국가 운영 방식, 가족 중심적 가치가 맞물리며 만들어낸 고유한 성공 경로였다”며 “한국은 제도와 문화가 결합해 독자적인 ‘대체 경로(substitute path)’를 개척했다”고 덧붙였다.
로빈슨 교수는 아프리카 사례를 언급하며 서구식 잣대로는 설명되지 않는 문화적 특수성을 강조했다. 그는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에는 약 4만5000개의 자치 공동체가 존재하며 권력이 분산돼 있었다”며 “이를 흔히 ‘국가가 약하다=실패’로 보지만, 사실상 아프리카 사회는 원하는 공동체의 자율성과 가치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현지 제도와 규범을 존중하지 않은 외부 개입은 늘 비극을 낳았다”며 개발 정책은 현지 맥락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설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산업화만 해도 다양한 길이 있었고, 모든 나라가 서구식 정상 경로에 도달할 필요는 없다”며 “성공의 정의 자체가 사회마다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개발경제학은 여전히 서구의 보편 모델을 비서구 사회에 끼워 맞추고 있다”며 “진정한 연구는 각 사회가 스스로 만들어낸 균형이 무엇인지, 그 균형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앞으로의 과제도 제시했다. 그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우리는 영국 명예혁명을 강조했지만 존 로크 같은 사상가를 언급하지 않았다”며 “제도의 사상적 기반을 간과한 것”이라고 되짚었다. 이어 “프랑스혁명을 루소나 볼테르 없이 설명할 수 없듯, 앞으로는 문화와 사상, 사회적 기반까지 포함해 제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지난 18일부터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 경제학자 대회(세계 계량경제학회 회의)는 오는 22일까지 이어진다. 이 행사는 세계 각국 경제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주요 현안을 토론하는 대규모 학술 콘퍼런스로 한국에서 개최된 것은 처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