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발친 교섭 요구에 기업들 혼란…“사용자성 판단 전 무대응 불가피” [노란봉투법 시행 한달]

지노위 ‘사용자성’ 판단 앞두고 일단 ‘무대응’
포스코 노조 4개 교섭해야…우려 현실화
4월 줄줄이 지노위 판단…“갈등 상시화될 것”


서울 시내에 노동조합이 원청과의 교섭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내건 모습. 정경수 기자


[헤럴드경제=권제인 기자]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이 오는 10일 시행 한 달을 맞는 가운데 산업계 곳곳에서 하청노조의 교섭 요구가 급증하면서 기업들의 혼란이 커지는 모양새다.

모호한 법 규정에 기업들이 ‘일단 무대응’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법 시행 이후 ‘노노갈등’까지 번지면서 노사 교섭의 난이도가 걷잡을 수 없이 높아졌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재계에서는 “노란봉투법 시행 전부터 제기됐던 부작용들이 현실화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재계에 따르면 주요 기업들은 노동위원회의 ‘사용자성’ 판단을 기다리며 사실상 대응을 보류한 상태다. 하청노조들이 잇따라 교섭을 요구하는 가운데 교섭 대상이 어디까지 확대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동일 사업장 내에서도 노조별로 교섭 단위를 따로 인정받는 사례가 등장하면서 기업으로서는 협상 구조 자체를 새로 짜야 하는 상황이다.

실제 현장에서는 복수 노조와의 교섭이 현실화하며 노사 관계가 빠르게 복잡해지고 있다. 경북지방노동위원회는 8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포스코하청지회와 전국플랜트건설노조 소속 하청 노동자들이 신청한 교섭단위 분리를 인정했다. 이에 따라 포스코는 최소 3개 하청노조와 각각 교섭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원청 노조까지 포함하면 교섭 대상은 4개로 늘어난다. 향후 유사 사례가 확산할 경우 기업별 교섭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노란봉투법 시행 첫날인 지난달 10일 서울 세종로에서 열린 민주노총 투쟁 선포대회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


기업들은 선제 대응이 오히려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자칫 교섭에 응하는 순간 원청의 책임 범위가 확대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실제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와 한국타이어, 제너럴모터스(GM) 한국사업장 등은 교섭 요구에 대응하지 않고 있다.

교섭 절차에 응한 일부 기업들도 사용자성 인정 범위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협상하겠다는 입장이다.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삼호는 지난달 사내하청지회를 교섭 요구 노조로 공고하며 공문에 명시된 협력사에 한해 절차를 진행하되, 향후 교섭 요구 사항 검토 결과 계약 외 사용자 지위가 인정되는 경우에만 교섭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한화오션은 안전 문제나 일부 처우 개선은 협의할 수 있지만 임금 인상은 교섭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경제계에서는 이 같은 혼란은 ‘법 규정의 모호성’에서 비롯됐다고 입을 모은다. 노란봉투법은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을 기준으로 사용자성을 판단하도록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판단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노동부는 임금 등은 원칙적으로 교섭 의제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노조가 교섭 의제를 명확히 밝히지 않거나 임금까지 의제로 포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노란봉투법이 하청 노조와 원청 노조 간 ‘노노갈등’으로 번지면서 노사 교섭의 난이도는 더더욱 높아지고 있다.

노동위는 2일 공공기관을 시작으로 대학, 공항공사, 기업까지 줄줄이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고 있다. 포스코 사례를 시작으로 하청 노조 교섭 단위도 쪼개지면서 사측의 비용 부담은 물론, 노조 간 갈등이 심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각 교섭 단위가 다른 요구사항을 내놓을 경우, 어떤 수준까지 수용할지를 두고 원청 노조 및 하청 노조간 신경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 포스코가 ‘7000명 직고용’을 발표하자 한국노총 금속노련 포스코노동조합은 성명을 내고 협력사 직원 직접 고용 방침에 대해 “공감대 형성이란 절차를 무시한 채 진행된 일 처리”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반면,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은 기존 정규직과 동일한 수준의 처우를 보장하고, 2차·3차 하청 노동자까지 포괄해 직고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달 10일 서울 세종로에서 열린 민주노총 투쟁 선포대회에서 집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 등이 행진하고 있다. [연합]


법 시행 전부터 경제계 안팎에서는 이 같은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해 12월 주요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87%는 노란봉투법이 노사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답했다. 특히, 하청노조의 원청 대상 교섭 요구 증가와 과도한 요구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응답이 74.7%로 가장 많았고, ‘실질적 지배력’ 등 모호한 기준으로 법적 분쟁이 늘어날 것이라는 응답도 64.4%에 달했다.

현재 기업들은 노동위원회의 판단이 나오기 전까지 대응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전날 포스코 사례에 이어 이날 국민은행, 하나은행, 쿠팡CLS, 포스코이앤씨 등 11개 기업에 대한 사용자성 판단도 순차적으로 나올 예정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4월 노동위원회 판단 결과에 따라 사용자성이 인정된 기업들은 수개월간 교섭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고, 가을 임금협상까지도 이어질 수있다”며 “노란봉투법 시행 전부터 우려했듯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섭이 쏟아지면서 노사 갈등이 상시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원청 노조와 하청 노조의 눈치를 모두 봐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 각 교섭 단위의 요구를 어떤 수준까지 수용하고 맞출 것인지도 계속해서 논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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