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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아트센터 ‘맥 모닝 콘서트’에서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라장조를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 [마포문화재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004년 가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엔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됐다. 남성 화장실 앞에 난데없이 여자 화장실 표지가 붙기 시작했다.
“공연의 남성 관객은 5%도 안 됐어요. 3층 남자 화장실 하나만 남겨놓고 전부 여성용으로 바꿨죠.”
당시 예술의전당 사장이었던 피아니스트 김용배 추계예술대 명예교수는 22년 전 가을을 웃으며 회상했다.
목요일 오전 11시, 브런치를 즐기듯 클래식을 듣는다는 신선한 발상이 시작된 때였다. 지금은 전국 유수 공연장에서 앞다퉈 마련하는 이 포맷의 ‘원조격’은 바로 김용배다. 대한민국 공연계의 지형을 바꾼 이 콘텐츠를 상징하는 주인공이다. 그야말로 아침을 깨우는 원조의 귀환이다. 김용배 교수는 마포문화재단과 손을 잡고 새롭게 선보이는 ‘2026 맥모닝(MAC모닝) 콘서트’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원조’라고 부르는 것도, ‘귀환’이라 말하는 것도 사양한다. 김용배 교수는 “이미 1987년 남산 힐튼 호텔에서 첫 시도가 있었다”고 귀띔한다. “한국에서 말러, 브루크너, 베르디 ‘레퀴엠’을 처음 시작하고,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를 창단한 큰 스승”인 홍연택 지휘자의 ‘마티네 콘서트’가 진짜 원조라고 한다. 다만 당시엔 일회성에 그쳤다.
그가 예술의전당 마티네 콘서트를 시작한 것도 이 공연을 ‘직관’했기 때문이다. 당시를 떠올리며 그는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낮에도 클래식 공연을 볼 수 있는 이런 콘서트를 하는구나 싶어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은 2004년 예술의전당의 ‘젊은 사장’에게 새로운 기획의 아이디어를 태동케 하는 발판이 됐다. “낮 동안 비어 있는 공연장 공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 “이 아름다운 공간을 낮에 국민에게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 끝에 ‘11시 콘서트’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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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의전당 사장 시절 마티네 콘서트 ‘11시 콘서트’를 기획, 진행하고 현재 ‘마음을 담은 콘서트’(예술의전당)과 ‘맥모닝 콘서트’(마티네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는 콘서트 가이드 김용배 [마포문화재단 제공] |
오전 11시라는 파격적인 시간과 ‘목요일의 브런치’라는 콘셉트가 정착하기까지는 치열한 내부 토론과 계산이 있었다.
”10시는 관객들이 이동하기에 너무 이르고, 12시는 직장인들의 점심시간과 겹쳐 번잡하잖아요. 최적의 시간인 11시에 공연을 시작해 1시에 마치면 인근 식당가에도 도움이 되죠.”
이 시간대는 당시 서울 강남권의 유일한 클래식 전용홀인 예술의전당이 저녁 공연을 위한 준비 시간을 갖는 데에도 무리가 없었다. 김 교수는 “오후에 공연을 하면 저녁 정기 공연의 리허설과 무대 환기 시간을 침해한다”며 “1시에 공연을 끝내면 이후 리허설 시간, 공연 준비 시간도 넉넉히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고 돌아봤다. 오전 11시의 ‘마티네 콘서트’ 시스템이 전국 모든 공연장과 문예회관의 표준 모델이 된 계기다.
성공을 확신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는 “흥행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고 했다. 다만 시대의 변화를 체감했다.
“1980~90년대와 달리 국민총소득이 높아졌고, 사람들의 예술적 갈증도 커졌다고 생각했어요. 저녁 공연을 보지 어려운 주부, 노년층, 야간 근무자에게도 음악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첫 공연은 지금도 생생하다. ‘페르귄트’ 중 ‘아침의 기분(Morning Mood)’으로 문을 열고, 라벨의 ‘볼레로’로 마무리했다. “아침 공연이니 사람들이 친숙하게 느낄 곡으로 시작하고 싶었다”고 그는 돌아봤다.
문제는 공연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이날의 공연은 오후 1시 반이 넘어 끝났다. 그는 “낮 공연은 밤 공연처럼 하면 안 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며 웃었다. 2004년 9월을 시작으로 그는 사장 임기를 마친 2008년 12월까지 이 공연을 진행한 뒤, 수많은 후배 해설자에게 자리를 넘겼다. 이후엔 KT와 함께 마티네 콘서트를 이어갔고, 현재도 예술의전당에서 토요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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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문화재단 ‘2026 MAC모닝 콘서트’ [마포문화재단 제공] |
‘맥모닝 콘서트’는 김용배 교수가 오랜만에 ‘새로운 이름’으로 찾아오는 마티네 콘서트다. 독보적 격조와 연륜이 쌓였지만, 그 사이 경쟁자도 늘었다. 저마다 ‘스타 해설자’를 캐스팅하고, 획기적 기획으로 전략을 세웠다.
마티네 콘서트의 핵심은 ‘해설’에 있다. 김 교수는 해설자인 ‘콘서트 가이드’를 “음악을 위한 디딤돌”이라고 말한다. 그는 “해설자는 주인공이 아니”라며 “음악을 향해 가는 징검다리”라고 했다. 이 철학이 김용배 ‘마티네 콘서트’의 특별함을 만들었다. 그의 공연엔 ‘세 가지’가 없다. “대본이 없고, 인사말이 없으며, 엔딩 세리머니가 없다”. 이는 평생을 연주자로 무대에 섰고, ‘콘서트 가이드’로 관객과 만나온 김용배의 관객과 연주자를 향한 배려에서 나온 철학이다.
실제로 공연에서 그는 무대로 올라와 긴 인사를 하지 않는다. 굳이 농담으로 분위기를 과하게 띄우려는 무리수를 두지도 않는다. 상투적 인사를 생략하고 ‘오늘 연주할 곡’의 이야기로 몰입한다. 그는 “관객들은 제 얼굴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들으러 왔다”며 “해설자가 음악보다 전면에 부각되거나 튀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연주자이자 교수인 ‘콘서트 가이드’는 백과사전보다 방대한 음악 지식, AI는 모르는 뒷이야기를 머릿속에 채웠다. 직접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연주자 섭외에 관여하는 그의 마티네 공연에선 이런 이유로 대본이 없다.
그는 “대본이 있으면 해설이 어색하고 딱딱해진다”며 “대신 공연 보름 전부터 머릿속에서 음악을 끊임없이 들으며 관객과 나눌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구성한다”고 했다. 사랑방에서 듣는 것처럼 흥미로운 옛날이야기가 흐르고, 때론 직접 전자 피아노를 연주하며 곡의 핵심 멜로디를 들려준다. 그러니 그의 해설은 지루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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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모닝 콘서트’ [마포문화재단 제공] |
독특한 점 중 하나는 ‘엔딩 세리머니’가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 곡이 끝난 뒤, 해설자가 다시 무대에 나와 마이크를 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의 아나운서나 진행자들은 관객들의 박수를 끊고 나와 “오늘 즐거우셨나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 김 교수는 “공연의 여운을 죽이는 가장 아쉬운 행동”이라고 했다.
“마지막 곡의 잔향이 울려 퍼지고, 관객들이 연주자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는 벅찬 감정의 상태 그대로 공연장을 떠날 수 있어야 해요. 해설자가 마지막에 찬물을 끼얹으면 안 되죠. 그래서 저는 마지막 곡의 해설을 마치면 그것으로 제 역할을 끝내고 조용히 무대 뒤로 물러납니다.”
‘마티네 콘서트’는 ‘클래식 대중화’에 기여했지만, 지난 오랜 시간 이어오며 적잖은 편견도 생겼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수준을 낮춘 가벼운 소품 무대’라는 인식이다. 김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20년 전부터 이야기했다는 ‘오이론’을 다시 꺼내 들었다.
“어린아이에게 몸에 좋은 오이를 먹이고 싶다고 해서 설탕을 듬뿍 발라주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는 설탕만 핥아먹고 정작 오이 본연의 마법 같은 맛은 영영 알지 못하게 됩니다. 클래식 대중화라는 것은 우리의 예술적 수준을 대중에게 맞춰 내리는 것이 아니에요. 예술적 고결함을 유지하되, 대중이 이 세계로 걸어 올라올 수 있도록 친절하게 손을 잡아주고 길을 안내해야 하죠.”
이러한 이유로 그가 구성하는 프로그램은 ‘마티네 콘서트’에선 듣기 힘든 곡들이 많다. ‘맥모닝 콘서트’의 레퍼토리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오는 27일 공연에선 프랭크 교향곡 라단조 2악장과 로드리고의 ‘4대의 기타를 위한 안달루즈 협주곡’, 림스키코프사코프의 교향적 모음곡 ‘세헤라자데’를 연주한다.
‘대중성’에 치우쳐 가벼운 곡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클래식 거장들의 ‘진한 원액’을 그대로 들려주는 것이다. 여기에 ‘콘서트 가이드’가 정교한 디딤돌을 놓아 관객들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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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아트센터 ‘맥 모닝 콘서트’에서 비제 오페라 ‘카르멘’ 중 ‘하바네라’를 부르다 관객에게 장미꽃을 주고 있다. [마포문화재단 제공] |
“멋진 악장 하나를 듣고 짜릿한 감동을 한 관객은, 공연장을 나가면서 ‘이 2악장 앞뒤에는 어떤 아름다운 멜로디가 숨어있을까?’ 하며 궁금해질 거예요.”
실제로 그가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를 진행할 당시, 로비에 자리한 음반 매장에선 그날 연주된 곡의 전악장이 담긴 CD가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다. 그는 “낮 공연에서 맛본 깊은 울림이 다른 연주회의 관객 확장의 마중물이 된다”고 봤다.
지난 3월, 첫 맥모닝 콘서트. 바이올리니스트 송지원이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라장조의 연주를 마치자 객석에선 옅은 탄성이 나왔다. 처음으로 마티네 콘서트를 보러 왔다는 최연미(66) 씨는 “오늘 처음으로 연주를 들어본 바이올리니스트인데 굉장히 잘해 깜짝 놀랐다”며 “이 연주자의 공연을 더 보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김용배의 마티네 콘서트는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숨은 보석들을 발굴하는 무대다.
지금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는 소위 톱2 전성시대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이라는 걸출한 이름이 등장해야만 흥행을 담보한다. ‘맛집’을 찾아가는 스타의 이름을 쫓아가는 현상이 클래식 공연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 클래식 시장의 ‘쏠림 현상’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전을 한 달에 한 번 올라가는 이 무대를 통해 내놓는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 클래식계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국이 됐지만, 스타 연주자들이 주축이 된다. 스들의 뒤에 가려져 있지만 실력 면에선 뒤처지지 않는 훌륭한 국내 연주자들의 무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지원은 앙상블 오푸스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매 무대 엄청난 기량으로 관객을 놀라게 한다.
김 교수는 “뛰어난 연주자들에게 무대를 열어주고, 관객들에게 ‘숨은 보석’을 발견하는 기쁨을 주고자 한다”며 “관객을 키우고 연주자를 발굴하고 클래식 시장 전체의 저변을 확장하는 시스템이 바로 마티네 콘서트의 의의”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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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모닝 콘서트’의 해설자 김용배 [마포문화재단 제공] |
한국 최초부터 치면 ‘마티네 콘서트’는 어느덧 40년의 역사를 맞은 클래식계 최고의 콘텐츠다.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달라진 환경이다.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AI)에게 질문하면 몇 초 만에 차이콥스키와 비발디의 곡에 대해 완벽하고 구체적인 해설을 제공하는 디지털 시대다. 그럼에도 굳이 아침 일찍 나와 해설을 겸한 마티네 콘서트를 찾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AI가 주는 정보는 아주 훌륭하고 일목요연한 ‘정보의 나열’이다. 거기에는 ‘밸런스(균형 감각)’와 ‘타이밍(호흡)’이 빠져 있다”고 말한다.
“종이 신문엔 각 면마다 커다랗게 들어가는 기사가 있고, 구석에 작게 들어가는 기사도 있어요. 그것이 바로 편집자가 세상의 경중을 안내하는 ‘밸런스 감각’이죠. AI식의 정보 나열은 무엇이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가려주지 못해요. 해설자가 무대 위에서 어떤 곡은 7~8분을 깊이 있게 설명하고, 어떤 곡은 단 2분 만에 절제하며 생략하는 완급조절이야말로 관객과 인간적으로 교감하는 편집이자 균형 감각이에요.”
“클래식을 비롯한 모든 무대 예술은 결국 ‘1초의 타이밍이 만드는 예술”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연극 배우가 대사를 던지고 관객의 호흡을 기다리는 찰나의 시간, 연주자가 폭발적인 에너지를 터뜨리기 전 객석에 흐르는 팽팽한 정적, 해설자와 연주자, 관객이 오전 11시라는 시공간에 모여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눈빛과 긴장감, 이 모든 것이 “디지털 모니터나 AI의 텍스트가 결코 복제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클래식 음악은 여전히 진입장벽이 높다. ‘아는 만큼 들리고’, ‘아는 만큼 재미가 크다’. 진짜 즐거움은 이 벽을 기꺼이 넘을 때 시작된다. 김 교수는 “하나의 음악을 알면, 하나의 행복이 온다”고 했다.
“클래식이 고급스럽다는 생각은 버려야 해요. 하지만 클래식이 주는 뭔가는 분명히 있어요. 클래식 음악을 조금씩 알아가는 그 소박한 기쁨이 우리의 메마른 삶을 얼마나 풍요롭고 윤택하게 만드는지 몰라요.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행복한 음악이죠. 인간이 인간에게 전하는 정성스러운 음악이 주는 위로를 마주하게 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