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뒷받침 반드시 필요” 미 의존 재확인
특정 이슈 의사결정이나 공동 성명 내지 못해
유럽군 파병도 이견…영·프 적극적, 독일 부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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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왼쪽)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 |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재침공을 막으려면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안전장치 역할을 해야 한다고 17일(현지시간) 말했다.
스타머 총리는 이날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유럽 주요국 정상들의 비공식 긴급회의에 참석한 뒤 “유럽은 유럽의 역할을 해야 한다. 평화협정이 체결돼 지속된다면 나는 영국군 파병을 검토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하지만 미국의 안보 보장만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재침공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미국이 반드시 안전장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EU 당국자들에 따르면, 정상들은 이날 회의에서 스타머 영국 총리 의견에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럽이 주도해 우크라이나에 안전 보장을 제공하더라도 미국의 뒷받침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아울러 정상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힘을 통한 평화’ 접근 방식에도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석자들은 스타머 총리가 언급한 대로 나토의 틀 내에서 수십년간 이어져 온 미국과의 안보 협력이 앞으로도 긴밀히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미국의 지원 수준에 따라 우크라이나에 안전 보장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을 밝혔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유럽과 미국은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고,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유럽과 미국이 안보 문제에 있어 책임의 분담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나토는 우리가 함께 행동하고 위험을 공유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보장한다는 점에 기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엘리제궁은 마크롱 대통령이 이날 회동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과 약 20분간 통화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독주로 인해 긴급히 성사된 자리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소통하며 불필요한 오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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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유럽 주요 정상의 긴급회의에 참석한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왼쪽),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로이터] |
▶트럼프 패싱에 긴급회동한 유럽 정상들, 공동성명 없어…폴리티코 “기대 이하” 혹평=유럽 주요국 정상들은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독단적 행보를 보이자 이에 반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으로 파리 엘리제궁에서 긴급회동을 가졌다.
참석자는 프랑스·독일·영국·이탈리아·스페인·네덜란드·덴마크·폴란드 정상과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이었다.
이들은 이날 오후 4시 프랑스 대통령실인 엘리제궁에서 비공개로 만나 3시간 반가량 회동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서양 동맹’ 관계를 무시한 채 유럽을 배제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 나서기로 하자 화급하게 대응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비공식 회동이었던 만큼 이 자리에서 특정 이슈에 관한 의사결정이 이뤄지진 않았다. 참석자들이 공동 서명한 선언문이 발표되지도 않았다.
유럽 각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 확인, 국방비 증액 확인 등 기존 의지를 재확인한 선에서 끝나 새로울 건 없었다.
이에 폴리티코 유럽판은 “유럽 정상들이 우크라이나에 관한 트럼프의 폭탄선언에 즉각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며 이날 논의 결과가 “기대 이하”였다고 혹평했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변함없는 지원 의지를 재확인하고, 현재 미국과 러시아 주도로 진행되는 종전 협상에서 우크라이나가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크라이나를 앞세우긴 했으나 사실상 유럽 땅에서 벌어지는 일과 관련해 유럽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자국 선거운동 문제로 가장 먼저 회의장에서 나온 숄츠 독일 총리는 기자들에게 “평화 협정에 대한 논의는 환영하지만, 우크라이나에 강요된 평화는 거부한다”며 우크라이나가 평화 협상의 당사자로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투스크 폴란드 총리도 “우크라이나 없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결정은 없어야 하고 유럽 없이 유럽에 대한 결정 역시 없어야 한다”고 했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도 “우크라이나의 평화와 유럽 안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며 종전 협상에 우크라이나와 EU가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도 엑스(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힘을 통한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본다”며 “우크라이나의 독립, 주권, 영토의 보전과 강력한 안보가 보장되는 평화를 존중할 것”이라고 적었다.
또한 미국과 안보 비용을 분담하기 위해 각국이 국방비 수준을 증액할 수 있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아울러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그 필요성이 더욱 커진 유럽 자강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논의했다.
투스크 총리는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며 “유럽 파트너들은 더 큰 유럽 방어 역량을 위한 시기가 왔음을 깨닫고 지출을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도 “유럽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비용 전액을 부담해야 하고 동시에 유럽에서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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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1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럽 주요 정상들의 긴급회의에 참석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AP] |
▶유럽군 파병에 대해서는 각국 입장 엇갈려…영·프는 적극적, 독일·폴란드 부정적=우크라이나 안전 보장의 핵심 요건인 평화유지군 파병을 두고는 각국의 입장이 엇갈렸다.
프랑스와 영국은 파병에 적극적인 반면, 독일과 폴란드는 회의적 반응을 유지하고 있다.
파병론에 부정적 입장을 보여 온 숄츠 총리는 관련 질의에 아직 전쟁 중이며 종전 회담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파병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답했다.
투스크 총리도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위해 폴란드는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 나설 것이지만 폴란드 군대를 파견하는 건 상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전날 언론 기고문을 통해 영국군 파병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스타머 총리는 관련 논의가 “초기 단계”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지속적인 평화 협정이 체결된다면 다른 국가들과 함께 영국군을 현지에 투입하는 방안을 고려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도 지난해 초부터 유럽군 파병 가능성을 언급하며 적극적인 입장이다.
성급한 종전 협상이 자칫 유럽에 더 큰 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메테 프리데릭센 덴마크 총리는 “불행히도 러시아는 지금 유럽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며 “너무 빠른 휴전은 러시아에 전열 재정비 후 우크라이나나 유럽 다른 나라를 공격할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EU 회원국 중 이날 파리 회동을 비판하는 진영도 있었다.
친트럼프·친푸틴 성향인 헝가리의 씨야르토 페테르 외무장관은 “오늘 파리에서 친전쟁, 반트럼프, 불만에 가득 찬 유럽 지도자들이 모여 우크라이나의 평화 협정을 막으려 한다”면서 “우리는 트럼프의 야망을, 미국과 러시아의 협상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도 이날 회동을 비판하면서 유럽군 파병 문제는 “EU가 관여할 수 없는 주제”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