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뒤 거래소 사라질 수도” 이사장이 직접 생존 경고 나선 까닭 [헤경이 만난 사람-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

글로벌 투자시장 ‘탈국경화’ 경쟁 가속
자국 투자자 기반 거래소 의미 퇴색
편의성 혁신 없으면 결국 도태 위기


“소니가 더 이상 텔레비전을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지금 구조로는 20~30년 뒤 한국거래소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서 자본시장을 둘러싼 환경 변화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TV 시장을 예로 들었다. 정 이사장은 “1980년대에선 국내에만 8개에 달했던 TV 제조업체가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도 3개 정도만 남았다”며 “거래소 산업 역시 장기적으로 비슷한 구조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1980년대에 소니가 더 이상 텔레비전을 만들 수 없는 세상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느냐”고 반문하며 “각국에 하나씩 존재하던 거래소 체제가 앞으로도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일부 소규모 시장은 점차 기능이 약화하거나 통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위기의식은 최근 자본시장의 ‘탈국경화’가 가속화하면서 더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국가별 거래소가 자국 투자자를 기반으로 비교적 안정적 구조를 유지했지만, 현재는 투자자 자금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것이 일상화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제 거래소는 국가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산업이 아니라 글로벌 유동성 경쟁에 직접 노출된 산업”이라며 “투자자들은 더 이상 자국 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수익성과 유동성이 높은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국내 개인 투자자들의 해외 투자 확대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미국·일본·중국 등 주요 시장으로의 자금 이동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거래소 간 경쟁도 과거엔 ‘국가 간 경쟁’이었다면, 이젠 ‘시장 간 경쟁’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 이사장은 이와 관련 작년 6월 나스닥 핵심 관계자와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 나스닥의 프리·에프터마켓에서 해외투자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육박했는데, 그 절반 수준이 한국인이었다는 대화였다. 그만큼 나스닥 내에 한국 투자자 비중이 상당하다는 의미다.

그는 “10년, 20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시장이 지역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화가 이뤄져 유동성이 풍부한 쪽으로만 흐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기술 변화 역시 구조 전환을 가속화하는 요인이다. 정 이사장은 디파이(DeFi), 토큰증권,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확산을 언급하며 “자본시장의 작동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부 글로벌 거래소에서는 이미 엔비디아, 테슬라 등 주요 종목을 토큰화해 24시간 거래를 제공한다.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실시간 결제 구조도 구축하고 있다.

이는 기존 거래소의 거래시간 제한과 결제 지연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변화이다. 실시간으로 거래 절차가 모두 완료되는 기술적 제반 환경은 이미 모두 구현된 셈이다.

정 이사장은 “결제 속도와 거래 편의성이 시장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며 “기존 T+2 체계에 머물러서는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가 24시간 거래 도입과 결제 주기 단축(T+1)을 핵심 과제로 제시한 이유도 이 떄문이다. 투자자 편의성을 제고하지 않으면 결국 유동성이 한계에 직면하고, 결국 거래소 존재 이유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아예 블록체인 등 가상자산과 경쟁할 수 있도록 실시간 결제(T+0) 체계 도입까지 궁극적으론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글로벌 시장이 이미 24시간 거래와 빠른 결제로 이동하고 있는 만큼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유동성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며 “글로벌 프리미엄 시장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국제 기준을 선제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홍태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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