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카르멘 아닌 정명훈”…연출 없이도 증명한 ‘오페라 신(神)’ [고승희의 리와인드]

29년만 KBS교향악단의 오페라
음악이 곧 ‘드라마’이자 ‘CG’였다

 

정명훈과 KBS교향악단 ‘카르멘’에서 강인한 집시 여성을 보여준 알리사 콜로소바 [KBS교향악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잘 조련된 명마처럼 금관 악기들이 리드미컬한 춤을 춘다. 단단하게 밀어붙이는 선율은 추동 엔진이 돼 흐른다. 다부지고 단호한 음표는 완벽하게 잘 짜인 ‘인생의 각본’.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비극이 이토록 짧은 3분에 담긴다. 아니나 다를까, 담배 연기처럼 피어난 현의 트레몰로, 심장박동처럼 바닥을 치는 팀파니. 그 사이를 가르며 한 인간의 운명이 도착한다.

세비야의 뜨거운 거리도, 투우장의 열기를 발산하는 경기장도 아니었다. 이렇다 할 세트도 없는 무대는 ‘조련사’ 정명훈의 양손이 공기를 가르자 19세기 스페인 세비야가 됐다. 남관모 KBS 교향악단 수석의 트럼펫이 날카롭고 정확하게 날아 꽂히고, 이원석 팀파니 수석의 강렬하고 경쾌한 타격이 이어지자 운명의 발소리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쾌활한 행진곡이 이내 절정에 다다르니 난데없이 늦춰진 템포. 현악기의 불길한 반음계 진행으로 ‘운명의 테마’가 이어지면 바순의 중후하고 어두운 음색이 귓가에 내려앉는다. 그쯤이면 관객도 눈치챈다. 등장도 하지 않은 카르멘과 돈 호세의 운명은 비극의 소용돌이라는 것을….

정명훈 지휘자와 KBS교향악단이 무려 29년 만에 오페라를 선보였다. 1997년 ‘오텔로’ 이후다. 정명훈과 KBS교향악단은 계관 지휘자 시절부터 무수히 많은 공연을 올렸지만, 콘서트 오페라를 선보이는 것은 음악감독 취임 이후 처음이다.

그야말로 ‘오페라의 신(神)’이었다. 두 번의 ‘카르멘’은 정명훈이 왜 오페라 명장이라 불리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연출과 시각적 스펙터클을 덜어내고도, 오로지 음악으로 승부하며 관객을 스페인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무대는 이질감이 없었다.

정명훈의 ‘카르멘’ 연습 현장 [KBS교향악단 제공]

블랙의 양장을 차려입은 오케스트라 사이로 군복과 집시 복장을 한 성악가들이 밀려들어도 이질감이 없었다. 음악이 드라마이자 세트였고, 그 어떤 CG보다 정교했기에 ‘카르멘’이라는 극 안에서 관객이 미아가 될 일은 없었다.

정명훈은 ‘카르멘’을 유혹적인 팜므파탈로 묘사하지 않았다. 카르멘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운명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히는 과정을 정교하게 설계했다. 오케스트라는 때로는 부드럽게 성악가를 감싸고, 때로는 폭발적인 볼륨과 배음을 통해 비극적 상황을 고조시키며 드라마를 끌어갔다. ‘음악으로 운명을 설계하는 방식’이 정명훈의 카르멘을 특별하게 만드는 핵심이었다.

카르멘 역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알리사 콜로소바는 정명훈의 해석을 온전히 입었다. 그의 첫 음이 떨어지는 순간, 공간의 온도가 달라졌다. 콜로소바의 하바네라 ‘사랑은 길들일 수 없는 새’는 익히 듣던 유혹의 노래가 아니다. 흉성이 낮게 깔려 의도적으로 리듬을 눌렀다. 미묘하게 늦춰지는 프레이징에서 콜로소바의 카르멘은 팜므파탈이 아닌 강인한 집시 여인 카르멘 자체로 존재했다. 누군가를 유혹하고 어장 관리하지 않는 데도, 이미 주도권을 쥔 사람처럼 노래했다. 정명훈은 집요하게 오케스트라를 얹으며 카르멘과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현악기의 피치카토는 그녀의 발걸음을 모방하듯 경쾌하게 튀어 올랐고, 목관악기는 그녀의 선율선을 따라가다가도 돌연 엇박자로 빗나가며 예측 불가능한 카르멘의 성격을 음향으로 형상화했다.

정명훈과 KBS교향악단 ‘카르멘’ [KBS교향악단 제공]

밀도 높은 카르멘의 곁에 선 미성의 돈 호세. 갈레아노 살라스는 미카엘라(김순영)와의 이중창 “말해줘요, 어머니에 대해”로 맑고 서정적 음색을 들려주더니, 극이 진행되며 목소리의 색채가 달라졌다. 2막 ‘꽃노래’에서 쏟아내는 집착의 서사엔 파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명훈은 오케스트라의 볼륨을 낮추며 테너의 목소리와 숨결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돈 호세의 심리적 붕괴는 현악기의 날카로운 트레몰로와 목관악기의 불안한 선율에 고스란히 실려 왔다. 마에스트로는 호세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마다 오케스트라의 다이내믹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며, 한 인간의 파멸을 음악적 드라마로 설계했다.

투우사 에스카미요 역의 베이스바리톤 김병길은 2막 ‘투우사의 노래’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독일 무대에서 갈고 닦은 풍부한 저음과 위풍당당한 음색은 투우장의 영웅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모든 구간마다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합창’이었다. 노이 오페라 코러스와 성남시립합창단이 반야드 홀의 잔향을 가득 채우며 극을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CBS 소년소녀합창단의 까랑까랑하고 명료한 딕션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비극적 서사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었다. 아이들의 첫 소절에 함박웃음을 짓는 정명훈의 모습도 이날의 명장면이었다. 노래가 끝났을 땐, 아이들의 등 뒤로 아낌없는 박수까지 보냈다. 비극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음악적 위트가 극과 현실을 넘나들어 만난 순간이었다.

정명훈과 KBS교향악단 ‘카르멘’ [KBS교향악단 제공]

이날 가장 놀라운 점은 KBS교향악단의 집중력이었다. 정명훈의 손끝을 따라 시시각각 호흡했고, 성악가들의 뒤에서 음악을 받쳐주고 이끌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현악기는 금관 악기가 뿜어내는 열기의 틈새를 촘촘히 메우며 긴장감을 노래했고, 목관악기는 쉴 새 없이 표정을 바꾸며 드라마를 쌓았다. 특히 3막 전주곡은 KBS교향악단이 정명훈 체제 아래 낼 수 있는 섬세한 소리의 백미를 보여줬다. 플루트와 하프가 빚어내는 목가적인 선율, 현악기군은 피아니시모는 고요 뒤에 찾아오는 폭풍의 서막이었다.

4막에서 환호하는 군중 속에서 카르멘과 돈 호세가 마주하는 장면에서 정명훈은 응축해 온 에너지를 폭발하며 소리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팀파니의 강렬한 타격, 금관악기의 날카로운 외침, 현악기의 격렬한 트레몰로가 한데 뒤섞이며 소리의 폭풍을 만들어냈다. 투우장에서 들려오는 합창의 환호는 이 비극적 죽음과의 잔혹한 대비였다.

압도적 존재감의 140분이었다. 이날의 ‘카르멘’은 거장 지휘자가 평생을 바쳐 탐구해 온 오페라적 진실을 들여다본 시간이었다. 특히나 동양인 최초로 ‘오페라 명가’ 라 스칼라의 음악감독이 된 정명훈의 여정이 얼마나 타당한지 체감하는 시간이었다. 라 스칼라가 정명훈을 선택한 것은 그가 지닌 오페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간 중심적인 음악 철학이 극장의 미래를 밝힐 최적의 열쇠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명훈의 ‘카르멘’ 연습 현장 [KBS교향악단 제공]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무대의 주인공은 카르멘이 아니라 정명훈이었다. 카르멘도 훌륭했지만, 이날은 오히려 오케스트라가 만드는 긴장과 에너지의 흐름이 더욱 부각됐다”며 “이번 공연에서 정명훈 지휘자가 음악을 통해 얼마나 정교하게 드라마를 구축할 수 있는지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했다. 극적 효과를 설계하는 능력이 본능적인 감각에 의존하면서도 만드는 방식은 치밀했다. 그의 지휘는 반주가 아니라 드라마 전체를 통제하는 주인공이었다”고 평했다.

이제 이 공연은 또 다른 조합을 통해 일본 도쿄로 향한다. 정명훈과 도쿄필, 라 스칼라 정예 멤버가 총출동한다. 오는 7월 공연이지만 이미 전석 매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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