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 투자’ 美 vs ‘불확실투성’ 韓…극과 극 투자 생태계

작년 글로벌 크립토 VC투자 200억弗 돌파
결제·정산·수탁·토큰화 등 인프라에 무게
미국, 블록체인 금융 인프라에 장기 투자
한국, 규제 불확실성에 투자 생태계 부족


지난해 4분기 크립토 스타트업 대상 벤처캐피탈(VC) 투자액은 85억달러로, 전분기 대비 84% 증가했다. [123rf]


해외 금융권이 블록체인을 차세대 금융 인프라로 보고 장기 투자에 나서는 동안 국내에서는 온체인화를 뒷받침할 전문 투자 생태계가 충분히 자라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규제 불확실성 탓에 혁신 기업을 키우는 생산적 금융의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분석이다.

14일 디파이라마에 따르면 글로벌 크립토 프로젝트 누적 투자액은 약 1388억달러를 기록했다. 디지털자산 시장 내 대표적인 벤처캐피탈(VC)로 꼽히는 기업들의 투자 건수는 ▷코인베이스벤처스 357건 ▷애니모카 브랜즈 238건 ▷판테라 캐피탈 191건 ▷a16z 108건 등으로 집계됐다.

크립토 VC 자금은 지난해 4분기 대형 투자에 특히 집중됐다. 갤럭시디지털 리서치에 의하면 해당 기간 크립토 스타트업 대상 VC 투자는 425건으로 투자액은 총 85억달러를 기록했다. 투자 건수와 금액은 전분기 대비 각각 2.6%, 84% 증가한 수치다. 연간 기준으로는 2025년 크립토·블록체인 스타트업에 200억달러 이상이 투자돼 2022년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알렉스 쏜 갤럭시디지털 리서치 총괄은 “지난해 4분기 전체 투자액의 56%가 후기 단계 스타트업에 집중됐다”며 “이는 산업의 성숙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전통 금융권의 크립토 도입이 확산되고 VC 투자를 받은 기업들이 실제 시장성을 입증한 결과라는 해석이다.

특히 그는 “투자 자본의 55%가 미국에 본사를 둔 기업에 투자됐다”며 “미국은 디지털자산 스타트업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다”고 했다. 지니어스법(GENIUS Act)과 클래리티법(CLARITY Act) 등이 미국의 전통 금융기업이 디지털자산 시장에 본격 진출하도록 유도할 것이라는 관측도 내놨다.


美, 단순 코인 투자 아닌 ‘금융 인프라’에 베팅=미국의 크립토 투자는 단순 토큰 가격 상승을 겨냥한 투자에서 결제·정산·수탁·토큰화 등 금융 인프라 투자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김진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미국 금융업권의 블록체인 활용 전략 차별화와 국내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미국 금융권이 업권별 비즈니스 모델에 맞춰 블록체인 활용 전략을 세분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 연구위원은 미국 자산운용사는 ‘자산의 온체인화’를 통해 운용자산(AUM) 확장의 새 동력을 찾고, 투자은행의 경우 ‘인프라의 온체인화’를 통해 결제·정산망의 주도권 확보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블랙록의 비들(BUIDL) 펀드, JP모건의 키네시스(Kinexys), 골드만삭스의 GS DAP 등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미국의 VC 역시 생태계 조성자로서의 역할을 확고히 하는 중이다. 김 연구위원은 a16z, 판테라 캐피탈 등 미국계 VC가 초기 프로토콜과 인프라에 장기적으로 베팅하며 블록체인의 제도권 진입을 뒷받침해왔다고 평가했다. 특히 하락장에서도 웹3의 장기 잠재력에 투자한 ‘확신 투자’가 생태계의 자금 공급과 신뢰 신호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다.

투자 대상도 달라지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7~2018년에는 전체 블록체인 VC 투자의 43.7%가 레이어1(L1)에 집중됐다. 하지만 2024~2025년에는 중앙화거래소(CEX) 13.3%, 인프라 10.5%, 디파이(DeFi) 9.5%, 베팅 9.3% 등으로 분산됐다. 초기에는 블록체인 네트워크 같은 기반 기술에 자금이 몰렸으나 최근에는 이를 실제 금융 서비스와 소비자 앱에 접목하는 기업으로 투자 범위가 확장됐다.

김 연구위원은 “미 금융권의 사례는 블록체인이 더 이상 변방의 실험 기술이 아닌 자본시장 전반의 운영체제로 자리 잡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며 “한국 역시 일률적 접근에서 벗어나 각 업권의 수익 구조와 핵심 역량에 부합하는 차별화된 온체인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아울러 “국내 VC 생태계에도 단기 성과에 매몰되지 않고 초기 단계 프로토콜에 자본과 지원을 제공하는 선제적이고 실험적인 투자 정신이 필요하다”며 “금융회사 차원에서도 현행 규제의 틀 안에서 혁신 기업을 지원하는 생산적 금융의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韓, ‘크립토 VC’ 생태계는 초기 단계=국내에도 해시드처럼 웹3 투자 생태계를 개척한 전문 투자사가 있다. 해시드는 해시드벤처스를 통해 벤처투자조합을 운용하는 한편 해시드오픈파이낸스를 통해 원화 스테이블코인 인프라를 겨냥한 레이어1 블록체인 ‘마루’ 테스트넷을 공개하는 등 직접 온체인 금융 인프라 사업으로도 보폭을 넓히고 있다.

다만 제도권 펀드가 가상자산을 직접 투자자산으로 담는 기준은 여전히 불명확하다. 그간 업계에서는 국내 법인의 가상자산 거래를 위한 실명계좌 발급이 오랫동안 제한돼 왔다. 법인 투자 가이드라인도 없어 유동성공급자(LP) 자금을 받아 운용하는 벤처펀드가 해외 크립토 VC처럼 다양한 투자 구조를 활용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최근 판테라 캐피탈과 퍼더벤처스로부터 시리즈A 투자를 유치한 김남웅 포필러스 대표는 “국내는 해외처럼 LP 자금으로 가상자산과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직접 투자하는 크립토 VC 구조가 사실상 어렵다”며 “일부 투자사가 블록체인 기업에 투자하고 있지만 자기자본 투자이거나, 펀드를 통한 지분투자 중심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2022년 쟁글은 ‘한국 가상자산 시장 리포트’를 통해 “국내 법인의 디지털자산 직접 투자는 불가능하며 대부분 펀드들은 개인 투자자 지위로 투자를 집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당 보고서에는 디지털자산기본법 도입으로 해외 유명 VC 등 법인의 직접 투자가 가능해지면 시장 성숙을 기대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러나 관련 입법은 여전히 답보 상태다. 지난해 말부터 제도화 논의에 다시 속도가 붙는 듯 했으나 지방선거 국면에 접어들면서 시장에서는 디지털자산기본법 입법 동력이 약해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금융위원회의 법인 투자 가이드라인도 아직 확정되지 않아 업계 전반의 불확실성이 이어지고 있다.

제도적 제약은 투자 유치 경로에도 영향을 미친다. 크립토 전문 펀드와 심사역 풀이 충분하지 않다보니 글로벌 확장을 염두에 둔 스타트업일수록 해외 VC와의 접점을 먼저 찾게 된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해외에서 다양한 크립토 투자를 경험한 VC와 협업해야 그들의 네트워크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며 “재무적 투자(FI) 측면 외에도 전략적 투자(SI)로서의 의미가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경예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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