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혜·이동규, 26년 우정이 빚은 ‘러브 듀엣’ [인터뷰]

24일 예술의전당, 20년 만에 ‘러브 듀엣’
2000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서 첫 만남
경쟁자에서 1호팬이자 내부 스파이로 변화
헨델~모차르트까지…오페라의 진화 노래


소프라노 임선혜와 카운터테너 이동규 [연합]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직도 첫 만남이 생생하다. 스물둘, 스물넷.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건강한 야망’으로 온몸을 던지던 시절이었다. 2000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였다. 당시 두 사람은 나란히 파이널 무대에 진출했다. 소프라노 임선혜(50)는 “지금은 한국인이 콩쿠르를 휩쓸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아시아인이 두 명이나 결선에 오른 전례가 없었기에 나름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지인’을 통해 이름만 알던 두 사람이 마침내 마주한 순간이었다. 외로운 경쟁과 고군분투의 장에서 둘은 서로의 ‘압도적 재능’을 알아봤다.

이동규(48)는 “선천적으로 좋은 목소리를 가진 성악가들은 많지만, 그걸 어떻게 해석하고 연기하느냐에 따라 음악의 방향이 완전히 갈린다”며 “(임)선혜 누나는 해석, 표현, 연기 등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아티스트였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제가 좋아하는 아리아를 누나가 많이 불렀는데, 다양한 해석을 배우게 된 만남이었다”며 웃었다.

아마추어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임선혜는 프로 냄새가 풍겼다. 독일에 살고 있던 그는 다른 참가자와 달리 자신과 오래 호흡을 맞춘 반주자를 대동했다. 대다수 참가자가 주최 측이 정해준 반주자와 경연을 치렀던 것과는 다소 달랐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풀어내는 이동규의 ‘그때 그 시절’ 회상에 임선혜는 “날 좋게 본 건 아마도 동규가 음악을 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과 목표, 추구하는 방향성이 맞닿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임선혜에게도 이동규의 모습은 ‘충격’에 가까웠다.

“풀랑크의 ‘호텔’을 부를 때였어요. 무대에서 피아노에 반쯤 누워 노래했어요. 외국인들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포즈로 여유 있게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남달랐어요. 동양인 카운터테너라는 존재 자체가 튀던 시절인데, 그 열정과 순수함이 무척 신기하고 대견해 보였죠.” (임선혜)

이후 무려 26년이 흘렀다. 콩쿠르를 통해 이름과 얼굴을 알리려 애썼던 두 성악가는 어느새 ‘거장’ 반열에 올라 다시 마주 선다. 두 사람이 한 무대를 갖는 것은 지난 2006년 ‘러브 듀엣’ 무대 이후 20년 만이다. 소프라노 임선혜(50)와 카운터테너 이동규(48)의 무대는 ‘화음의 결합’을 넘어 척박한 세계 무대를 함께 개척해 온 한국인 성악가들의 ‘우정과 예술의 연대기’다.

최근 서울 종로에서 만난 두 사람은 “20년 전 무대가 치열한 패기를 증명하는 자리였다면, 지금은 온전히 하나의 서사를 그려가는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소프라노 임선혜와 카운터테너 이동규 [인터뷰]


경쟁자에서 1호팬으로…유럽, 북미서 ‘내부 스파이’ 자처


콩쿠르에서의 만남 이후 둘은 서로의 든든한 ‘1호 팬’이자 ‘조력자’가 됐다. 일찌감치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북미 무대에서 활동하던 이동규는 자신의 음반사에 틈만 나면 임선혜를 추천하며 ‘홍보맨’ 역할을 했다. “‘넥스트 OOO’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썼어요. (웃음)” (이동규)

유럽 무대에 먼저 길을 닦으며 거장들과 호흡을 맞추던 임선혜는 유럽 진출을 꿈꾸는 이동규에게 소속사를 추천하고 ‘유럽 활동 매뉴얼’과 같은 실질적 조언을 건냈다. ‘맨땅에 헤딩’하며 쌓아온 네트워크와 고급 정보를 아낌없이 나누며 서로의 성장을 견인한 것이다. 이동규는 “누나는 유럽 진출할 때 정말 큰 도움이 된 내부 스파이이자 동료였다”며 웃었다.

강산이 두 번은 달라지고, 싱그러운 청춘엔 원숙한 깊이가 쌓였다. 그 사이 이동규는 유럽 오페라 무대를 섭렵했고, JTBC ‘팬텀싱어’를 통해 두 번째 전성기를 맞는 스타 카운터테너가 됐다. 임선혜는 필리프 헤레베허, 르네 야콥스와 한 무대에 서는 독보적인 ‘고음악 디바’로 자리했다. 두 사람이 지금에 이르러 부르는 노래들은 20년 전과는 다른 빛깔을 띤다.

“그 땐(2006년엔) 무서운 게 없었어요. 어떻게 이런 걸 하지, 누가 생각이나 할까 싶은 걸 거침없이 시도했죠. 그래서 20년 전 프로그램엔 듀오로 할 수 있는 모든 재밌는 곡들은 다 했어요. (웃음)”

임선혜의 이야기를 듣던 이동규는 “욕망과 야망이 보글보글 들끓던 때”라고 말을 보탠다. “세계 5대 극장에 서겠다”, “가장으로서 빨리 성공하겠다”는 마음이 이글거리던 시점이었다. “잘하는 것은 노래밖에 없고 경주마처럼 내달렸던” 20대의 이동규와 “이 삶이 정말 최선일까”라는 노래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던 임선혜는 ‘러브 듀엣’으로 원 없이 그 시절의 음악성을 증명했다. 이젠 서로의 숨소리만 들어도 의도를 알아채는 여유와 관록이 생겼다.

임선혜는 “경험치가 쌓이고 머리가 커지면 각자의 아집이 생기기 쉬운데, 우리는 5초 정도 삐질지언정 서로의 직설적인 음악적 조언을 흔쾌히 수용한다”고 했다. 이동규도 마찬가지다. 그는 “누나와의 호흡은 즉흥으로 가도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 편안하다”며 “디테일이 향상된 지금, 서로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고 했다.

소프라노 임선혜와 카운터테너 이동규 [연합]


오그라드는 헨델, 현실 연애 모차르트…진화한 ‘사랑의 서사’


‘러브 듀엣’의 두 번째 이야기는 ‘오페라의 진화’를 보여준다. 고음악 성악가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헨델과 헨델의 영향을 받은 모차르트다.

이동규는 “헨델이 벨칸토 음악의 원조라면, 모차르트는 (이후 고전주의와) 그 중간을 잇는 브릿지 역할을 한다”며 “헨델을 통해 영웅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의 신화를 보여준다면, 모차르트를 통해선 유머와 질투가 섞인 현실적인 인간의 사랑을 그려내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공연의 지향점도 20년 전과는 다르다. 2006년엔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쏟아냈다면, 이번 무대는 하나의 서사를 이루도록 구성했다. 헨델의 ‘리날도’,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와 같은 익숙한 곡부터 낯선 아리아까지 ‘사랑의 변화’로 엮었다. “모르는 곡조차 ‘신곡’을 듣는 것처럼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고 두 사람은 귀띔한다.

헨델과 모차르트의 사랑은 너무도 다르다. 영웅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의 표상인 헨델과 달리 모차르트는 ‘현실 연애’의 장인이다. 사랑에 빠지면 어리석은 실수를 연발하고, 이전의 나와는 다른 모습이 되는 연인들의 모습을 가져왔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며 쏘아붙이는 직설 화법과 질투는 그야말로 동시대 사랑의 모습이다.

임선혜는 “헨델의 가사는 고전 시처럼 운율이 살아있다. 때론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정제된 로맨틱한 언어로 시적인 이상향을 노래한다”며 “반면 모차르트는 바로 지금 우리의 연애처럼 직접적이고 직설적”이라며 웃었다.

“이상적 언어와 현실적 ‘밀당’(밀고 당기기)이 5대5로 존재해야 재밌는 연애이지 않을까 싶어요. 공연에서도 헨델의 낭만과 모차르트의 현실을 오가며 통쾌함을 주리라 생각해요.” (임선혜)

26년의 세월을 쌓아 올려 완성한 ‘러브 듀엣’은 그 어떤 화성보다도 진한 삶의 울림이다. 경쟁자로 처음 만났지만,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었고 끝내는 음악적 안식처가 된 두 사람이 들려줄 ‘사랑의 모든 순간’은 그것 자체로 이들이 걸어온 시간의 여정이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이들을 다시 한 무대로 이끈 바탕은 ‘사람’이었다. 이동규는 “자신만의 뚜렷한 예술적 목표를 무대 위에서 완벽히 통제하는 누나의 모습엔 예나 지금이나 배울 점이 참 많다”고 했다. 임선혜도 “나이와 경험이 쌓인 지금도 동규 씨 안엔 소년의 순수함과 여전한 열정이 살아있다”며 “그와 음악을 나눌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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