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역사] ‘우리가 남이가?’의 딜레마 – 고대 백제와 일본의 동반자 관계



백제 근초고왕, 일본에 손을 뻗치다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년)은 일본의 사신, 치쿠마 나가히코와 함께 벽지산에 올라 양국 간의 우호를 다짐했다(‘벽지산 맹약’).

근초고왕은 몇 해 전, 가야지역 탁순국(현 경남 창원)의 한 왕에게 일본과의 통교 주선을 부탁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일본 국왕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진의를 확인한 후 근초고왕의 낙동강 유역 가야 7개국 평정을 위해 군사를 파견해 지원하며 군사동맹을 맺었다. 이때부터 백제와 일본의 동반자 관계가 수립되기 시작했고 가야의 여러 나라는 백제의 세력권에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두 국왕은 태자들에게도 양국이 후대에 이르기까지 친하게 지낼 것을 당부했다.

백제 왕자들 일본에 파견하고 왕녀는 시집보내

17대 아신왕은 태자 전지를 일본에 파견하여 8년간 체류시키면서 양국은 더욱 밀접한 관계로 발전했다. 전지의 부인인 팔수부인은 전지가 일본 체류 중에 결혼한 일본 왕족 출신의 여성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21대 개로왕의 동생 곤지 왕자는 무려 16년간이나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왕족 출신 여성과 결혼하여 5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의 둘째 아들이 바로 24대 동성왕이다. 이 밖에도 20대 비유왕은 누이 신제도원을 일본으로 시집보냈다. 이와 같이 백제는 왕자들을 일본에 파견하고 왕녀를 시집보내는 왕족 외교를 전개하며 일본과 돈독한 관계를 굳혀나갔다.

일본이 사활을 걸고 백제를 지원한 이유

신라가 532년 금관가야를 합병하고 562년에는 가야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자 일본은 크게 반발한다. 이 지역이 정권 지배층의 출신지이거나 연고지였기 때문이다. 금관가야와 대가야는 무기와 농기구 제조 원료로 쓰이는 철의 산출지라서 규슈 북부지역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를 얻고자 가야지역에 이주하여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규슈 지역 토기 등이 다량 발견된다.

낙동강과 영산강 일대 한반도 남해안 지역은 원삼국시대인 마한 진한 변한 가운데 변한의 땅이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부터 한인과 왜인이 한반도 남부와 규슈 북부지역을 오가면서 ‘남이 아닌 우리’로서 경제와 문화공동체를 이루며 공존해 오던 땅이었다. 이곳에서 발굴되는 전방후원분 분묘 형태와 옹관묘, 그리고 순장 풍습은 규슈 북부지역과 같은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 사서에서는 “양쪽은 문화적으로 다른 점이 없다”라고 기술한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유민들은 백제 땅 수복을 위해 일본에 구원군 파병을 요청하는데 이때 일본의 덴지 천황은 약 2만 7000명이란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했으나 금강 하구 전투에서 강대국 당나라 군대에 궤멸당했다. 일본이 정권의 사활을 걸고 백제에 구원병을 파견한 것은 옛 연고지를 되찾기 위해서였으나 그 목표는 좌절되었고 백제와 일본 간 300여 년 동안 이어진 동반자 관계도 막을 내렸다.

영산강과 낙동강 유역의 변한 지방과 일본 규슈 북부 지방의 전방후원분 묘에서 출토되어 두 지역이 밀접하게 연계되었음을 보여주는 옹관. [출처 : 일본 후쿠오카박물관 소장, 필자 촬영]


일본, 마침내 한반도 연고권을 포기

백촌강 전투를 주도했던 덴지 천황이 사망하자 쿠데타를 일으켜 천왕에 즉위한 덴지의 동생 덴무 천황은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위기의식을 느끼며 더 이상 가야에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깨닫고 한반도를 ‘우리 땅이 아닌 남의 땅’으로 간주하며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는 생각을 굳힌다. 그래서 그는 국호를 ‘왜(倭)’에서 ‘니혼(日本)’으로, 군주의 호칭을 ‘오기미(大王)’에서 ‘덴노(天皇)’로 바꾸고 역사서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하여 천황제라고 하는 새로운 국가 이념을 제시하며 국가 체제 개편에 착수했다.

일본은 줄곧 친백제 일변도였던 구체제, 야마토 정권의 외교 노선과 단절하고 가야지역에 대한 일본의 연고권을 포기한다는 메시지를 신라와 당나라를 향해 던졌다. 그리고 나당연합군이 668년 9월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하고 보장왕이 항복하면서 700년 왕조 고구려가 멸망하자 일본은 그 직후에 신라 사신 김동엄을 통해 김유신과 문무왕에게 배 한 척씩을 선물했다. 한반도의 강자로 등장한 신라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 후 일본의 한반도 침탈행위는 고려시대 왜구의 준동 때까지 상당 기간 찾아볼 수 없다.

덴지 천황은 대대로 이어져 온 백제와 맺은 맹약과 이를 담보하는 혼인동맹에 집착하여 대의명분과 의리에 치우친 판단을 내린 결과 무모한 파병을 감행하여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초강대국 당나라와 한반도의 강자 신라의 보복 침공 위협에 맞닥트리면서 국가 존망 위기에 직면했다. 심지어 전쟁에 반대했던 호족들의 반발로 민심이 흉흉해져 정권마저 흔들렸다. 필자는, ‘맹약’에 사로잡힌 나머지 무너져가는 백제에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가 자칫 공멸할 뻔한 일본 덴지 정권을 보면서 지도자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가치는 생존이라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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