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이나 미션 대신 설렘·관계에 집중
그동안 놓친 연애의 본질에 관한 질문
넷플릭스의 일일 예능 ‘연애 실험실’
처음 본 남녀가 사흘밤 침대 소개팅
첫 회부터 고자극 상황 실험형 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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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X4 죽어도 사랑해’ 오키나와편 [유튜브 채널 룩백lkbk] |
먼저 짐을 푼 여자는 금세 낯선 동네에 스며든다. 꽃집 사장님과 함께 ‘깔깔깔’ 웃고, 잔잔한 바다 곁에 멈춰 서서 평온을 즐긴다. 아버지를 보며 사랑을 배웠다는 그는 쉽게 연애하고 쉽게 이별했던 시간을 지나, 이제는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주고 싶은 사람이 되기로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외계 생명체가 지구를 침공하기 전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여자와 지구 멸망 직전의 시간을 함께할 사람은 평생 연애를 후순위로 미뤄둔 채 일만 하며 살아온 한 남자다. 잠시 낭만을 잊고 살았던 여자와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달려온 남자. 과연 두 사람은 멸망까지 남은 나흘 동안 멸망을 피해 서로에게 또 다른 세계가 되어줄 수 있을까.
5월 말 공개된 ‘4X4 죽어도 사랑해’ 오키나와 편의 이야기다. 콘텐츠 제작사 블랙페이퍼가 유튜브 채널 ‘룩백lkbk’을 통해 선보이고 있는 연애 콘텐츠다. 지구 멸망을 앞두고 처음 만난 두 사람이 버킷리스트를 함께 지워나가며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편당 1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오롯이 두 남녀의 이야기로만 채워낸다. 출연자의 속마음을 추리할 패널도, 관계를 흔드는 게임도, 다음 화를 보기 위해 던져놓는 자극적인 장치도 없다.
시청자에게 주어진 역할은 단순하다. 그저 두 사람이 함께 걷고, 웃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카메라도 최선을 다한다. 두 사람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골목과 바다, 바람과 햇살까지 함께 기록한다. 그 시간과 공간의 온도, 습도까지 담아낸 화면은 느린 호흡에도 불구하고 설렘과 감동, 그리고 힐링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덜어남과 느림으로 가득 찬 ‘4X4’ 오키나와 편은 첫 번째 삿포로 편에 이어 다시 한번 7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빠름의 미학이 지배하는 시대,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연애 콘텐츠가 가장 ‘순정’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4X4’ 이야기로 문을 연 오늘의 취향의 발견이 주목한 것은 바로 ‘연프’다. ‘짝’이 틔우고 ‘나는 솔로’가 키운 연애 예능은 ‘하트시그널’, ‘솔로지옥’, ‘환승연애’ 등을 거치며 전성기를 누렸다. 사랑이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관심사임을 증명하듯, 지금도 연애 예능은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하고 있고, 그 노력은 시청자들의 선택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최근의 변화는 조금 다르다. 낯선 남녀가 한 공간에 모여 서로를 탐색하고 최종 선택을 하는 익숙한 공식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도전과 실험 정신으로 무장한 새로운 프로그램들은 연애 예능의 다음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더라
남녀가 모여 서로를 선택하는 것이 한때 연애 예능의 공식이었다면, 오늘날의 연애 콘텐츠는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 자체에 집중한다. ‘4X4’와 그 짝꿍 격인 ‘72시간 소개팅’의 인기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72시간 소개팅’은 블랙페이퍼가 여기어때의 유튜브 채널 ‘때때때(TTT)’와 함께 만든 콘텐츠다. 처음 만난 일반인 남녀가 여행지에서 3박 4일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낯선 장소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일정 시간 동안 함께 머문다는 점에서 ‘4X4’와 비슷한 포맷을 공유한다.
지난해 후쿠오카 편으로 시작한 ‘72시간 소개팅’은 타이완 편을 끝으로 잠시 휴식기를 가졌다가 최근 홍콩 편으로 돌아왔다. ‘레전드 편’으로 불리는 삿포로 편은 200만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72시간 소개팅’은 최근 가장 많이 언급되고,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연애 예능’의 주인공임엔 틀림없다.
이들 콘텐츠는 연애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다시 꺼내 놓는다. 연애란 결국 ‘누구를 사랑하느냐’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를 어떻게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는가’의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한정된 시간 동안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하고,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 자체가 이렇게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기도 하다. 어느덧 시청자들은 출연자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모난 부분과 상처까지도 함께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경청과 공감, 진심 어린 대화와 추억들은 ‘연애’라는 목적지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연애 예능에서 놓치고 있었던 것들일지도 모른다.
잔잔하고 느린 롱폼형 연애 콘텐츠의 인기는 어느 순간 사회 실험실처럼 변하고, 인플루언서들의 자기 홍보 무대가 돼버린 연애 예능의 현실의 반작용인 듯 보인다. 설렘보다 갈등이, 사랑보다 논란이 화제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런’ 없는 연애 예능은 상상하기 어려워졌고, 출연자의 직업과 스펙, 과거 연애사와 사생활은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된 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 일반인 출연자들의 진정성 역시 롱폼형 연애 콘텐츠의 중요한 경쟁력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모두가 놀라울 정도로 잘생기고 예쁜 ‘갓반인’들이지만, 적어도 프로그램 안에서만큼은 자신의 감정에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해 ‘모태 솔로’들의 서툴고도 솔직한 연애 도전기를 담아내며, 연프계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넷플릭스의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의 인기와도 궤를 같이한다. 진정성과 순수함을 이길 것은 없다는 것은 여기서 또 증명된다.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한 제작사 관계자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에 없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유튜브 롱폼 연애 콘텐츠의 인기는 기존 연애 예능이 잃어버린 순수한 감정을 복원했기 때문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남의 연애를 보면서도 치유와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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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일일 예능 ‘연애실험실’ [넷플릭스 제공] |
처음 보는 남녀가 한 침대에서? 연프는 또 달린다
물론 본질로의 회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방송사들은 한편으로 더욱 과감한 실험에도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넷플릭스의 일일 예능 ‘연애실험실’이다. 제목 그대로 다양한 상황 속에 참가자들을 놓아두고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관찰하는 실험형 연애 예능이다. ‘환승연애’와 ‘연애남매’를 만든, 이른바 ‘연프 장인’ 이진주 PD의 신작이기도 하다.
첫 회부터 ‘고자극’ 그 자체였다. 바로 ‘처음 보는 남녀가 3일 밤 동안 한 침대에서 소개팅을 한다면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라는 파격적인 주제 때문이다. 약간의 스포일러를 공개하자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낯뜨거운 설정 안에서 출연자들이 꾸밈없는 모습으로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의외다. 제작진이 깐 기상천외한 판 위에서 출연자들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모습이 꽤나 신선하다.
관련해 이진주 PD는 최근 진행한 제작발표회에서 “연프가 어디까지 다변화될 수 있는지 생각한다. ‘연애실험실’이 ‘연프실험실’이라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며 “정말 다양해질 수 있다고 믿어서 도전하는 마음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3일 첫 방송한 JTBC ‘연애전쟁’은 또 다른 방향을 택했다. 이 프로그램은 연애의 시작이 아닌 끝을 이야기한다. 위기에 놓인 커플의 사연을 듣고 패널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연애 지속과 결별 사이를 두고 토론하는 형식이다. 따지자면 설렘보다 갈등과 선택에 주목하는 ‘이혼숙려캠프’의 연애버전으로 이해하면 된다.
프로그램을 연출한 권해봄 PD는 “연프라고 하면 보통 남녀가 만나서 어떻게 호감을 갖고, 사랑을 싹틔워 나가고 설렘의 순간을 가지는지를 그리지만, 사실 연애는 그렇게 달콤하고 웃기지만은 않다”면서 “연애를 하면서 전쟁 한번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냐. 그런 연애의 민낯을 생생히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모솔연애’도 7일 시즌2로 돌아온다. 또 얼마나 자기 세상에 빠진 참가자가 시청자와 ‘썸메이커스’들을 속 터지게 만들지, 또 어떤 돌발 행동으로 뜻밖의 감동을 안겨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또 열심히 응원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모태 솔로’였으니까.
덜어냄과 실험.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지금의 연애 예능들은 모두 같은 질문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사랑이라는 주제는 언제 어디서나, 어쩌면 영원히 유효하다. 그리고 연애 예능은 지금, 그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서고 있다. ‘환승’ 이후의 시대, 연프는 또 한 번 새로운 판을 짜고 있다.
손미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