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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장에서는 “표준을 쥐는 자가 패권을 잡는다”는 말이 있다. 1990년대 초 미국에서 기술 표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퍼진 이 표현은 오늘날 국제표준화기구 전통의학 기술위원회(ISO/TC 249)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세계 전통의학 시장은 웰니스 트렌드와 예방의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전통의약 시장 규모는 2022년 기준 약 5186억 달러, 우리 돈 약 740조 원에 달했으며, 연평균 8.2%씩 성장해 2027년에는 약 7682억 달러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은 ISO/TC 249에서 괄목할 만한 표준개발 성과를 축적해 왔다. 매선침, 맥진기 등 우리 기술 기반의 의료기기 분야와 한약재 벤조피렌 측정 등 한약재 분야에서 다수의 국제표준을 제정하며 기술적 경쟁력을 입증했다. 최근 개최된 총회에서도 한국이 제안한 5건의 국제표준안이 다음 단계로 진입했고, 3개의 신규 안건에 공동프로젝트 리더로 참여하게 됐다. 이는 참석국 중 중국에 이어 주목할 만한 성과로, 국내 한의약 기술과 산업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이 될 것이다.
한국은 전통의학을 제도권 내 의료체계로 명확히 법제화하여 현대의학과 병행 발전시켜 온 몇 안 되는 국가다. 오랜 기간 국민에게 폭넓은 의료 선택권을 보장하며 축적해 온 임상 데이터와 안전성 검증 인프라는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앞서 나갈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자, ‘한의학의 고유한 영토’다.
그러나 국제 무대의 경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중국은 자국 중심의 중의학 생태계를 국제표준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일본 역시 산업계를 중심으로 적극 참여하며 자국 기술과 제품의 표준 반영을 모색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국제표준화 활동은 전문가 개인의 사명감과 일부 연구기관의 고군분투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어 지속적인 대응에 한계가 있다. 특히 최근 총회에서는 중국이 제안한 국제표준 문서 내 한자 표기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국제표준이 특정 국가의 체계에 편중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강하게 제기하며 안건 처리를 보류시켰으나, 향후에도 국제표준의 중립성과 국내 산업 기반을 지키기 위한 지속적인 공조와 대응이 시급한 상황이다.
한 번 제정된 국제표준은 향후 무역 장벽이 될 수 있는 만큼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이제 국제표준은 단순한 가이드라인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의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축적해 온 의료체계의 우수성을 지키고 세계 시장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책적 뒷받침이 시급하다.
무엇보다 국제표준화 활동이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전문인력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아울러 한국의 안건에 힘을 보태줄 우호국을 확보하고, 국제표준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글로벌 표준화 네트워크 구축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전통의학의 미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기회의 창은 오래 열려 있지 않다. 현장의 역량에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더해진다면, 우리는 국제표준 확보를 기반으로 한의약의 글로벌시장 진출을 확대하고 세계 헬스케어 산업에서 진정한 퍼스트무버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이유정 한국한의학연구원 국제표준기획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