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많았지만 국내에선 최초의 시도”라는 김진만 PD(MBC ‘킬미, 힐미’)의 이야기가 무색하게도 이미 수목 안방에선 ‘소재 유사성 논란’을 빚은 두 편의 드라마가 방영 중이다. ‘킬미, 힐미’에서 총 7개의 인격을 연기하는 배우 지성은 지난달 21일 진행된 드라마 기자간담회에서 “오늘 어떻게 될지 진짜 궁금해요. 현빈이잖아요”라고 말했다. ‘하이드 지킬, 나’에서 2개의 인격을 소화하는 배우 현빈이 4년 만에 복귀하는 날이었다.
드라마는 상당히 ‘닮은꼴’이다. 해리성 인격 장애를 가진 ‘재벌가 2, 3세’ 남자와 무지개 빛깔보다 선명한 그 많은 인격을 사랑하는 여자들의 재기발랄한 로맨스. 지난 수년간 지상파 드라마가 사랑해왔던 ‘멜로’ 장르와 ‘재벌’ 소재가 최근 안방극장의 화두로 떠오른 ‘정신병’과 만났다. 하지만 희비는 엇갈린다.
지난달 7일 첫 방송을 시작한 MBC ‘킬미, 힐미’는 지난달 29일 방송 기준 8회 만에 두 자릿수 시청률(11.5%ㆍ닐슨코리아 집계ㆍ전국 기준)을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같은 시간 방송되는 SBS ‘하이드 지킬, 나’는 방송 4회 만에 6.6%로 추락했다. 첫 회에서 8.6%를 기록한 이후 4회 내내 내리막이다.
▶ 지성 vs 현빈=‘킬미, 힐미’는 배우 지성의 만개한 연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인 7역의 부담스러운 연기가 도리어 17년간 쌓아온 지성의 연기 내공을 폭발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제1인격인 젠틀하고 상처 많은 재벌3세 차도현을 중심으로 지성은 나쁜 남자 신세기, 능청스런 전라도 사나이 페리박, 7세 소녀 나나, 자살 중독 고교생 안요섭, 아이돌을 사랑하는 여고생 안요나를 비롯한 7개의 인격을 소화한다. 다양한 인격이 툭툭 튀어나와 조연 역할을 하는데 인격마다 달라지는 신 들린 연기에 마침내 배우 지성의 존재 가치가 입증되고 있다. 심지어 지난달 26일 방송에서 여고생 요나를 연기하자, 돌연 ‘지성 립스틱’이 화제가 됐다. ‘전지현 립스틱’ 부럽지 않은 완판남의 등장이었다.
1인 7역이 이미 안방을 선점한 상황에 등장한 현빈의 ‘하이드 지킬, 나’는 수적 열세로 다소 단조롭다는 느낌이다. 인기 웹툰 ‘지킬 박사는 하이드씨’를 원작으로 삼은 이 드라마는 이기적이고 못되먹은 재벌2세 구서진과 ‘구하는게 성격’이라는 착한 남자 로빈의 싸움이다.
현빈은 두 인격을 달리 표현하기 위해 ‘안경’과 ‘보조개’를 소품으로 활용하며 극과 극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어딘가 기시감이 든다.
현빈의 구서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나치게 예민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입대 전 마지막 작품인 ‘시크릿가든’ 속 재벌2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어느새 30대 중반에 접어든 현빈의 놀라운 자기관리 능력이 빛을 발하는 것도 이 드라마의 특징이다.
▶ 황정음 vs 한지민=널뛰기 하는 인격들을 사랑하는 여주인공은 황정음과 한지민이다. 다중인격 ‘남주’가 아무리 활개를 친다 해도 결국엔 ‘기승전멜로’인 두 편의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그저 ‘거드는 존재’로 머물수 만은 없다. ‘킬미, 힐미’의 황정음은 지성의 ‘비밀 주치의’로 모든 인격의 돌발행동을 막고 있으며, ‘하이드 지킬, 나’의 한지민은 남자의 인격이 분리되는 계기를 만든 주인공이다.
황정음의 경우 오랜만에 비극을 벗었다. “드라마 속 캐릭터에는 자기만의 사이즈가 있다”는 이른바 ‘사이즈 론’을 펴는 황정음은 “지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선전포고로 ‘킬미 힐미’를 시작했는데, 밝고 유쾌한 여주인공의 지론이 적절해 두 배우가 살아나는 결과가 됐다. 원작 웹툰과의 높은 싱크로율로 기대를 모았던 한지민도 오랜만의 복귀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있지만, 출연 분량에 비해 두 개의 인격을 소화하는 남자주인공의 인격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기 위한 조력자라는 인상이 짙다.
▶ 7 vs 2 ‘다중인격’활용도=같은 소재를 다루나 두 드라마가 ‘다중인격’소재를 활용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은 바야흐로 ‘정신병의 시대’(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로 돌입한 현대인의 삶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신적인 충격이 일상화되고 ‘멘붕’(멘탈붕괴)이라는 신조어까지 유행하는 사회현상을 반영해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다”(정덕현)는 해석이다. 이는 곧 두 드라마의 기획의도이자, 주제이고 이들 작품의 명분과도 직결한다.
‘킬미 힐미’는 드라마의 제목처럼 7개의 인격이 하나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데, 이는 곧 ’생존‘의 문제와 결부돼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인다. 다만 로맨틱 ‘코미디’인 탓에 백주대낮의 난투극처럼 난데없이 등장하는 상황 설정이 많은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반면 ‘하이드 지킬, 나’는 두 인격의 묘한 공존을 추구하면서도, 둘로 갈라진 인격의 외로운 싸움이나 고뇌는 비치지 않는다. 다중인격은 오로지 멜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만 사용한다는 인상이 짙다. 또한 충분한 흥행요건은 갖췄으면서도 드라마 속 배경이 된 제2롯데월드라는 공간처럼 예쁘고 동화같은 분위기만 만들어내려는 연출과 종종 장황해지는 대본이 검증된 두 배우를 살리지 못 한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두 편의 드라마는 멜로를 큰 축으로 재벌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킬미, 힐미’의 경우 ‘누가 나를 차지할 것인가’라는 생존을 돋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시청자의 공감대가 더 높은 드라마”라고 봤다. 그러면서 “대본, 연출, 연기의 삼박자가 균형을 이룰 때 좋은 드라마가 나온다. 세 가지 요건이 적절한 축을 만든 바탕 위에서 공감요소를 많이 갖춘쪽이 대중적인 성공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사진제공=MBC, SB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