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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TBC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박경세’를 연기한 배우 오정세 [프레인TPC 제공] |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박경세’는 어쩌면 우리가 익히 봐왔던 오정세의 얼굴 중 하나였다.
다섯 편의 영화를 개봉시킨 감독인 그는, 오랜 친구이자 여전히 입봉조차 하지 못한 채 말만 앞서는 ‘황동만’(구교환 분)의 존재가 껄끄럽다. 남들이 ‘성공’이라 부르는 자리에 올라섰음에도 어딘가 모를 불안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남자. 박경세를 보고 있자니 인정 욕구에 휩싸여 비뚤어졌던 권경민(SBS ‘스토브리그’), 웃기면서도 짠한 소인배의 모습을 보여줬던 노규태(KBS ‘동백꽃 필 무렵’)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자신보다 한참 뒤에 있다고 여겼던 친구를 보며 느끼는 껄끄러움의 출처는 어디일까. 경세는 왜 성공이라는 단어 위에서도 그토록 불안하게 서 있는 걸까.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는 주인공 동만과 영화사 PD ‘변은아’(고윤정 분)의 이야기인 동시에, ‘성공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던’ 경세가 열등감에서 벗어나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낸 성장기이기도 하다.
드라마 종영 후 서울 강남구 모처에서 오정세를 만났다. 작중 ‘경세’의 마음과 캐릭터를 연기하며 배우가 가졌던 생각, 그리고 그의 오랜 무명 시절과 ‘무가치함’이란 감각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쉬지 않고 오갔다. 차분한 말투에 실린 담담하고도 솔직한 답변들이 인간 오정세의 생각과 감정을 조용히 비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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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무싸’ 스틸컷 [스튜디오 피닉스, SLL, 스튜디오 플로우 제공] |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제목부터 좋았어요. 자신의 가치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방영 초반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적지 않았다.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를 집필한 박해영 작가 특유의 느린 호흡과 열등감, 질투 같은 불편한 감정들이 진입장벽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쉽게 호감을 주지 않는 인물들이 시청자들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찌질함은 공감 가능한 결핍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깊고 느리게 파인 대사들은 감춰진 감정을 비추는 거울이 됐다. 그렇게 작품은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했고, 2%대로 출발한 시청률은 최종회에서 5.3%를 기록하며 유의미한 상승 곡선을 그렸다. 12부에 걸친 작품의 여정 역시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 나가야만 하는’ 인생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과정과 닮아 있었다.
비호감 캐릭터의 지분에서 경세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친구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고, 때로는 치사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은 영화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한심했다. 문제는 그렇게 한없이 찌질해 보이는 감정들이 낯설지 않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마냥 손가락질하기에도 어딘가 껄끄럽다.
“경세는 다섯 편이나 영화를 개봉한 감독이지만, 스스로는 떨어질까 봐 두렵고 더 올라가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이에요. 극적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경세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누구에게는 다섯 편의 영화가 성공일 수 있고, 누구에게는 대학 합격이 성공일 수 있지만, 그 안에서도 또 발버둥 치며 살아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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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무싸’ 스틸컷 [스튜디오 피닉스, SLL, 스튜디오 플로우 제공] |
오정세는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이 작품은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배역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좋은 책을 읽고 난 뒤의 감정과 비슷했다고 했다. 작품에 참여하며 그가 세운 목표는 단 하나. 자신이 대본을 통해 읽고 느낀 것들을 시청자들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다.
“한 자 한 자, 귀한 단어들을 놓치지 않고 잘 전달해야겠다는 게 저의 첫 번째 목표였죠. 그런데 그 목표를 100%로 잡다 보니 스스로 강박이 생기더라고요. 장문의 대사 안에서도 정서와 자유로움이 함께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2% 정도의 여유를 두고 연기했죠.”
불안하게 흔들리는 경세의 곁에는 태풍 앞에서도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아내 도혜진(강말금 분)이 있다. 경세의 못난 구석까지도 모두 품어내는 혜진 덕분에 그의 아우성이 때로는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경세가 보조작가와 미묘한 기류를 형성했을 때 많은 시청자들의 질타가 쏟아진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에 대해 오정세는 해명 아닌 해명을 내놓았다.
“시청자분들 입장에서는 경세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작가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저를 신나게 해주는 어떤 존재라고 생각했거든요. 극 중에서도 작가와 경세 사이에는 늘 모니터가 있었잖아요. 남녀 간의 끈이 아니라 창작자로서 연결된 관계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경세는 쉽게 미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순간에는 위태롭게 발버둥 치는 그를 응원하게 된다. 자신의 과오와 부끄러움을 끝내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용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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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TBC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박경세’를 연기한 배우 오정세 [프레인TPC 제공] |
“남의 이야기로 데뷔했다는 사실을 끙끙 앓아오다가 결국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고, 평생 1등만 하려고 아등바등 살아왔지만 이제는 ‘3등 정도면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용기가 있는 사람이기에 마냥 밉지만은 않은 게 아닐까요.”
오정세는 1997년 영화 ‘아버지’에서 단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2017년 영화 ‘조작된 도시’를 통해 대중의 주목을 받기까지 20년 가까운 세월을 조·단역으로 버텼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무가치함’을 느낀 적은 없었느냐고 묻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힘들고 좌절한 적은 있지만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오래, 길게 일하고 싶다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오디션에서 계속 떨어질 때도 ‘나는 좋은 배우인데 안 뽑는 게 손해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저를 안 뽑은 사람들이 오히려 안 됐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죠.”
‘모자무싸’가 끝나기 무섭게 오정세는 MBC 새 드라마 ‘오십프로’의 취권 고수 불개로, 그리고 개봉을 앞둔 영화 ‘와일드 씽’의 발라드 왕자 성곤으로 다시 대중 앞에 선다. ‘모자무싸’가 남긴 정서적 배부름을 양분 삼아 그는 또 다른 작품들을 향해 걸어갈 준비를 마쳤다.
“귀한 대사들을 만나고 앓으면서 감정적으로 정말 배부른 시간을 보냈어요. 오래 버틸 수 있는 정서적인 양식이 채워진 것 같아요. 혹여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꼭 이 작품을 보며 공감도, 위안도 얻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